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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삭발- 이상권(정치부 서울본부장·부장)

  • 기사입력 : 2019-05-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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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발은 신체를 담보한 투쟁이다. 약자의 억울함 호소이자 저항의 적극적 몸짓이다. 공개적 자학을 통한 결기의 외형화다. 자해의 고통은 자신의 결의를 다지고 타인의 공감을 끌어올리는 언어다. 대중의 분노를 촉발하고 집단의식을 공유한다. 단식이나 분신 같은 극단적 저항과는 비교하지 못해도 시각적 상징성과 파장은 강렬하다.

    여야를 떠나 기득권층으로 불리는 정치인을 약자로 분류하기는 무리다. 그런데도 유독 경남 출신 정치인의 삭발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창녕이 고향인 설훈 의원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에 항의하며 삭발과 단식 투쟁을 벌였다. 통영·고성 지역구 이군현 전 의원 등 한나라당 원내부대표단은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2007년 삭발했다. 당시 투쟁은 성공으로 끝났다. 한나라당 의중이 반영된 사학법 재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현재 한국당 국회의원이 된 강석진 의원은 지난 2010년 거창군수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거창에 뼈를 묻겠다”며 ‘삭발투혼’을 펼쳤다. 하지만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에 여의도 정치권에 삭발 투쟁이 등장했다.

    지난달 30일 자유한국당 박대출(진주갑) 의원이 불을 지폈다. 더불어민주당 등 여야 4당이 강행한 선거제·공수처 관련 법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대한 항의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는 페이스북에 국회 사무실에서 자신이 직접 삭발하는 사진과 ‘근조(謹弔), 20대 국회는 죽었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사그라진 민주주의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한 작은 저항의 표시로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이 작은 저항의 물방울이 큰 바다를 이루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박 의원의 바람대로 이틀 후인 지난 2일 윤영석(양산갑) 의원 등 5명이 ‘저항의 물방울’에 동참했다.

    하지만 꼭 7년 전 삭발을 ‘감정적 표출’이나 ‘퍼포먼스’로 폄하하던 그가 스스로 머리를 깎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게다.

    2012년 4월은 19대 총선전이 한창이었다. 정치신인이던 박대출은 새누리당 공천을 거머쥐었다. 재선의원을 지낸 최구식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3일 앞두고 최구식이 삭발이란 강수를 뒀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가 전주 유세에서 ‘LH공사를 진주로 강탈해 갔다’는 발언이 빌미가 됐다. 무소속이지만 보수 성향이던 최구식의 삭발은 선거전 막판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왔다.

    박대출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시민들은 삭발과 같은 감정적 표출이나 퍼포먼스가 아닌 냉철하고 현실적인 대응을 주문한다”고 평가절하했다. 7년의 세월이 흘러 정치적 명분에 따른 ‘대의’를 내세웠지만 삭발이란 수단을 선택한 점은 아이러니다.

    일부에선 삭발을 놓고 ‘구석기 시대 투쟁 방법’이라며 평가절하한다. 트위터 등 SNS에는 조롱 섞인 희화화가 넘친다. 민주당 한 의원은 공개적으로 페이스북에 비아냥을 쏟아냈다. 그는 “(박대출) 두상이 잘생긴 것은 알려지게 됐다”고 비꼬았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엔 여성인 나경원 원내대표의 삭발을 촉구하는 청원이 올랐을 정도다. 당사자는 ‘결연’한 의지로 감행한 삭발이 놀림감으로 전락한 걸 보면 이젠 그 약발도 다한 모양이다.

    이상권 (정치부 서울본부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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