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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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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4-어제, 오늘 그리고 청춘] 통영 두석장 이수자 김진환 씨

오늘도 두드린다… 5대째 잇는 ‘장석 예술’

  • 기사입력 : 2019-05-2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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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끼이이이”. 오래된 장롱의 문을 여닫을 때면 특유의 여운이 남는 삐걱거림을 들을 수 있다. 세월의 녹이 낀 경첩에서 나는 이 소리는 주인과 함께 보낸 긴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자개농이 최고급 혼숫감으로 여겨지던 20세기 말까지는 어느 집에서나 심심찮게 이러한 전통 목가구를 찾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목가구에 부착하는 경첩, 자물쇠, 각종 금속 장식 등을 일컫는 ‘장석(裝錫)’, 조선 시대에는 ‘두석(豆錫)’이라고 불린 금속공예품 역시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전통가구가 사라지면서 두석이라는 단어 자체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뜻하는 ‘두석장(豆錫匠)’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다. 국어사전에는 있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두석은 몇몇 장인들에 의해 간신히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통영에 우리나라의 소중한 무형문화재인 두석장을 잇는 청년이 있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의 이수자 김진환(39)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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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이수자인 김진환씨가 통영 서피랑 아래 '통영 명정골 장석집'에서 닥달 망치질을 하고 있다.

    김씨의 집안은 5대째 가업으로 두석장을 해오고 있다. 가업은 고조할아버지인 고 김보익 선생 때부터 시작됐다. 대한제국 시대 군인이었던 김보익 선생은 나라가 망하면서 통영의 통제영 (統制營·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에 있던 12공방에서 두석장으로 전업했다.

    메인이미지작업을 마친 반닫이 자물쇠 앞바탕을 살펴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통제영은 경상·전라·충청의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본영(현재 해군본부)으로, 통제영 에 군수품과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12공방은 당시 지방 최대의 공방이었다.

    고조할아버지에 이어 증조할아버지인 고 김춘국 선생 역시 뛰어난 두석장이 됐으며, 지난 1980년 11월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보유자가 된 할아버지 고 김덕룡 선생은 섬세한 수작업으로 두석을 만들어 통영을 대표하는 명물로 명성을 날렸다. 아버지 김극천(69) 선생도 할아버지가 작고한 뒤인 2000년 7월 무형문화재의 기능을 원형대로 체득·보존하고 이를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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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환씨가 장석을 부착한 전통 목가구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자장가로 찾아온 두석= 통영, 그리고 두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김씨는 두석이 마치 자장가와 같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작업실에서 망치로 쇠붙이를 두들기던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씨는 ‘통영 명정골 장석집’(통영시 명정동 284)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일할 때 사용한 오래된 목조 작업대를 어루만지며 이같이 회상했다.

    “어릴 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할아버지와 함께 여기 앉아 작업하고 있었다. 항상 늦은 시간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망치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망치 소리가 안 들리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김씨는 20살 때인 지난 2000년 경북과학대학교 문화재관리과에 입학해 공예를 전공한 뒤 23살부터 아버지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두석의 일을 배워 28살에 두석장 이수자가 됐다. 두석과는 바늘과 실의 관계인 목가구, 나전칠기 등 전통가구가 쇠퇴하면서 할아버지·아버지 아래에서 일을 배우던 분들이 떠나자, 김씨는 자신이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할아버지 때는 전통가구가 워낙 부흥하던 시기여서 일도 많고 작업도 많았다. 하지만 2000년에 들어서면서 아파트가 많아지고, 붙박이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전통가구가 맥을 못 추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며 “아버지 밑에서 배우시던 분들도 생활이 어려워지자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는 걸 보고, 저라도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돈벌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있게 해준 가업이고 꼭 지켜야 할 문화재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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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환씨가 줄질을 하고 있다.
    메인이미지김진환씨가 줄질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아버지 명예에 누 끼칠까 걱정=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씨는 무엇보다 통영 두석장으로 명성을 떨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예에 누를 끼칠까 우려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워낙 솜씨가 좋았다. 가구 수리요청이 들어오면 엄청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할아버지의 작품을 보면 아직 나는 이 정도까지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도 새로운 작업을 가르쳐 주시면 내 딴에는 완벽하게 했다고 여겼는데, 아버지가 ‘이거는 쓰지도 못한다’고 얘기하시면 아직도 기술이 모자라구나 느끼고 있다”며 “아직은 이수자여서 괜찮지만, 이후 보유자가 된다면 할아버지·아버지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생활고도 적지 않은 고민이었다. 아버지에게 지급되는 전승지원금을 나눠 쓰는 형편이다 보니, 자신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 등 3인 가족이 생활하기 위해 별도의 부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매일 밤 통영시 미수동에 위치한 낚시방에서 일하고 아침에 퇴근한 이후 오전 동안 두석 일을 하고 오후 1시께가 돼서야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시 낚시방으로 향한다.

    그런데도 김씨가 두석장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적지만 이를 찾는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두석에 깃든 예스러운 멋 때문이다. 그는 “전통가구가 많이 망가져서 수리를 맡기신 분이 한 달 뒤 완전히 새 것처럼 변한 가구를 보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제일 보람된다”며 “전통가구가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예스러움이 살아난다. 장석도 처음에는 광을 내서 반짝반짝하다가 세월의 때가 끼면 뿌옇게 흐려지는데, 그것도 나름의 멋이 있다. 사람들이 이런 멋을 알아봐 주면 좋겠다”고 했다.

    ◆함께 가업 잇는 든든한 조력자 아내= 김씨 곁에는 함께 가업을 잇는 아내 서지화(43)씨가 있다. 서씨도 김씨의 아버지 아래에서 두석장을 전수하고 있으며, 두석밖에 모르는 남편과 시아버지를 대신해 가사는 물론 두석 의뢰와 관련한 대외업무를 돌보고 있다. 두석장의 길을 걷고 있는 김씨와 서씨를 이어준 것은 뜻밖에도 ‘치킨’이었다. 2남 1녀 중 막내인 김씨는 지난 2012년 창원에 살고 있던 매형이 장사를 권유해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에서 치킨집을 운영했다. 서씨 역시 인근에서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동종업계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했다. 서씨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지겨워서 다른 일을 하려던 중 우연히 어머니 친구분의 아들이 하던 치킨집을 물려받아 운영하면서 남편을 만나게 됐다. 쌩뚱맞게 지금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치킨집을 하다가 둘이 만났다”며 “처음에는 신랑이 연하여서 고민도 많았다.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다. 그런데 신랑이 너무 진국이고 착해 결혼했다. 기왕 결혼한 거 제대로 (두석장)을 이수받아서 제대로 해보자고 해서 가게를 정리하고 통영으로 왔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집에 미대 출신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대시를 했다”는 농담으로 맞장구를 치던 김씨는 “아버지는 주로 통영 장석에 국한해 작업해 왔다. 하지만 저는 다양한 장석에 도전해보고 싶다”며 “통영에는 나비 문양의 백동 장석을 많이 쓴다. 강화도 쪽에는 반닫이가 유명한데,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어 숭숭이 장석이라고도 불린다. 이것도 재연해보고 싶고, 복원도 해보고 싶다. 도전해보고 실패도 해봐야 성공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안대훈 기자 ad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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