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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물산장려운동- 차상호(사회부 차장)

  • 기사입력 : 2019-07-16 2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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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손으로 맨든 광목’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조선물산장려회의 선전 문구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듬해인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과 김동원 등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자작자급 운동을 펼쳤고, 1922년 조선청년연합회에서도 조선물산 장려운동을 펼쳤고, 1923년부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에도 자본가를 위한 운동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침체를 겪다 1940년 일제의 의해 강제해산됐다.

    ▼‘부자와 빈자를 막론하고 우리가 우리의 손에 산업의 권리 생활 제일 조건을 장악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생명, 인격,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첫째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고, 둘째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를 목적하노라.’ 1923년 1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만든 기관지 ‘산업계’에 실린 물산장려운동 취지문이다.

    ▼1920년대 들어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1923년 일본과 우리 사이의 관세 대부분이 철폐되면서 일본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였다.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난 이유였다. 물산장려운동에 앞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었다. 일제는 한일협정서를 근거로 차관을 강제적으로 들였다. 1907년 대일 국채는 1300만원을 넘어섰다. 대일 국채는 1년 만인 1907년 1840만원으로 불어났다.

    ▼1906년 기준으로 대한제국의 한 해 예산 규모가 1300여만원이었다. 한 해 예산만큼의 국채는 갚을 길이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일본은 철저한 계산 속에 외교적으로 군사적·경제적·문화적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공고히 했다. 2019년 지금 우리는 일본의 자본과 물산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문해본다. 냉정이든 열정이든, 이성이든 감성이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차상호(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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