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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4-어제, 오늘 그리고 청춘] 진주오광대 전수자 정현수 씨

공허한 삶 떨치고 신명난 삶 펼치다

  • 기사입력 : 2019-07-23 21: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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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 춤, 연주, 연극적 요소, 해학과 풍자의 미학이 어우러진 오광대는 종합예술이다. 광대라는 이름의 그 시대 예능인들은 짜여진 각본보다는 그때그때 놀이판의 분위기에 따라 관중들과 호흡하며 즉흥적인 재담을 이어갔다.

    특히 지난 2003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진주오광대는 1930년대 일제 탄압에 의해 중단된 이후 1990년대 성금 모금 등 적극적인 시민들의 참여와 구체적인 복원 과정으로 부활해 역사·문화적으로 가치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놀이판뿐만 아니라 복원 과정에서도 시민과 함께했다.

    큰 달빛 아래서 이뤄지는 진주오광대를 이어가는 젊은 예능인이 있다. 진주오광대 전수자 정현수(34)씨를 지난 19일 진주시 판문동 진주오광대전수교육관에서 만났다. 그의 익살스러운 행동과 표정에서 해학을 엿볼 수 있었던 동시에 고단했던 삶의 역경을 걸어온 애환도 느껴졌다.


    진주오광대 전수자 정현수(34)씨가 오광대 탈이 걸린 게시대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이솔희VJ/

    ◆사고뭉치 소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농악의 문을 두드리다

    진주 토박이인 정씨는 어린시절 보통 개구쟁이가 아니었다. 돌을 던져서 학교 유리창을 깨고,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는 스승의 자동차 바퀴의 바람을 빼고 도망가던 소년이었다. 정씨의 어머니는 장난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들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정씨가 진주의 봉래초등학교 3학년이던 그때 어머니는 학교 농악부의 문을 두드렸다. 소년 정씨의 주체 못할 에너지가 다른 방향으로 발산되면 조금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제가 어릴 때 원캉(워낙) 사고뭉치이다 보니까 어머니가 그 기운을 잠재우고 싶어서 농악부에 들게 했어요. 그렇게 처음 시작은 진주삼천포농악이었는데 이상하게 좋더라고요. 소리도 좋고 가슴에 와닿았다고 해야 할까. 당시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진주오광대에 속해 있던 분이셨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오광대를 알게 됐죠.”


    ◆접어야 했던 꿈, 텅빈 삶

    예나 지금이나 예체능계 학생들에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정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함께했던 친구들이 집안의 지원을 받아 하나둘 서울의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와중에 정씨만 진주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배움에서 빠지지 않는 게 가난이다. 레슨비도 만만치 않죠. 중·고등학교 이후 친구들이 하나둘 서울로 가버리니 저만 외톨이가 돼버렸던 것 같아요. 나만 도태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요. 고등학교에서도 배우긴 했지만, 예전처럼 몰입이 되질 않아 취미생활 정도에 그쳤어요”라고 술회했다.

    정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경찰행정학과로 대학에 진학했다. 경찰공무원이 돼 생계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1학기만 다니고 군에 입대했고 정씨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산, 부산, 진주 지역에서 각각 조선소, 유선 통신업체, 제지회사에서 그는 일했다. 20대 중반의 나이 치곤 수입도 짭짤했다. 많이 벌 때는 인센티브로 하루에 1000만원을 받기도 했으며 차량도 2대나 끌고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벌기 위해 아침 6시에 눈을 떠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삶이 반복됐다.

    “월급이 400만원이라고 하면 주 단위로 받았기 때문에 매주 100만원씩 통장에 꽂혔어요. 그런데 하루에 많게는 4시간, 적게는 2시간… 거의 쪽잠 자는 수준이었고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일만 하는 일충? 돈 버는 기계? 그게 너무 싫었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뭘 하고는 있는데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때려치웠어요. 본능적으로 학창시절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 친구 등 진주오광대와 관련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본의 아니게 접었던 길인 만큼 아마 다시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시 시작, 해방감

    일을 그만둔 정씨는 진주오광대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입을 통해서 과거 그를 들뜨게 했던 전통예술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됐다. 그러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해도 되는 걸까라는 고민을 거듭했다. 때마침 정씨는 진주오광대에 속한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그는 선생님에게 “다시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어, 해”라고 답했다. 그렇게 2013년 정씨는 진주오광대 전수자가 됐다.

    정씨는 “저는 다른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뭐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 ‘다시 생각해봐라’라든지. 그런데 대뜸 하라고 하시니 앞서 했던 고민들이 바보같이 느껴졌죠”라며 “그러고 며칠 뒤 바로 공연에 올라갔어요. 의상도 없는데… 그런데 몸이 막 반응을 하는 거예요. 예전에 했던 경험들이 아직 내 몸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물론 하면서도 이게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많이 들었죠. 공연자로서 보러 온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니었다”며 “정작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기를 쓰고 달려들었죠. 관객들을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공연자로서 직무유기니까요. 그래서 아마 정말 꾸준히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라고 했다.

    2017년 진주 남강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20회 진주탈춤한마당에서 진주오광대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진주오광대보존회/
    2017년 진주 남강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20회 진주탈춤한마당에서 진주오광대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진주오광대보존회/

    어려움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주 또박또박 통장에 입금되던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지고 특히 친구들의 만류도 거셌다. 정씨는 “저는 어머니만 계시는데, 솔직히 어머니의 반대는 크지 않았어요. ‘할 수 있겠어? 그럼 해!’가 다 였어요. 대신 친구들 반대가 정말 심했죠. 공연을 가야 하는데 제 차에 있던 의상을 들고 도망친다든지, 술을 마시고 울면서 하지 말라던 친구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씨가 진주오광대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이전 삶에서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이 컸다. 그는 진주오광대에서 악사를 맡고 있으며 주로 북과 징을 다룬다. 악사는 무대 중심에서 탈을 쓴 채 춤을 추고 말을 하는 연희자와 달리 무대 가장자리에 위치해 무대 전체를 바라보며 때론 신명나게 때론 서글픈 장단을 뽑아낸다.

    정씨는 “설움, 한(恨)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복잡한 감정들이 다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속 시원히 해소돼요”라며 “악사로서 제가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진주오광대 공연이 정말 재밌기도 재밌지만 그 속에 담긴 교훈과 해학이 복잡한 제 고민과 상황을 풀어준 거죠. 제 자부심인데, 진주오광대는 어떤 오광대보다 내용이 탄탄합니다”라고 말했다.

    ◆쉬지 않고 정진

    “예술하는 사람들의 기량은 죽을 때까지 올려야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이만큼 했으니까 내일은 이만큼을 더 해야 되고 그 다음 날은 또 이만큼을 더 해야 되고 항상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 되고 더 좋은 소리, 더 좋은 몸짓, 더 좋은 그런 걸로 보답을 해야 하는 것이 공연자의 입장이니까.”

    정현수씨가 지난 19일 오후 진주오광대전수교육관에서 장구를 치고 있다.
    정현수씨가 지난 19일 오후 진주오광대전수교육관에서 장구를 치고 있다.

    정씨는 같은 분야에서 거의 최고 수준의 기량을 보이는 또래 친구들보다 늦었던 만큼 더 노력하고 있다. 진주오광대 안에서도 한 가지를 파고들기보다 여러 가지를 하다 보니 성장이 더딘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진주오광대에 발 붙인 지난 6년 동안 흘린 그의 땀 덕분인지 이따금 선생님들의 ‘물 올랐다’, ‘많이 성장했다’라는 평가에 정씨는 상당히 고무된다고 했다. 진주오광대로 들어오긴 했지만, 제 몫을 해내지 못해 겉돌던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제대로 이곳에 속하게 된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정씨의 꿈은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예술하는 친구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은 거죠. 물론 나중에 제가 그럴 정도가 됐을 때 얘기지만요. 정말 최종 목표이자 꿈입니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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