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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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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641) 제24화 마법의 돌 141

“경찰이 시민을 죽였다!”

  • 기사입력 : 2019-08-05 08: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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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보다 쌀값이 10배나 폭등했다.

    미군정은 쌀의 자유판매를 금지하고 미곡수집령을 내려 쌀을 강제로 수매했다. 쌀을 수매하여 안정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을 동원하여 쌀을 헐값으로 빼앗아가자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게다가 5월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다. 콜레라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조선시대도 한 번 창궐하면 수천 명,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46년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콜레라로 죽었다.

    대구와 경북지역에서만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자 집집마다 곡성이 그치지 않았다. 미군정은 콜레라의 확산을 막는다면서 대구와 경북지방의 교통을 통제했다. 그러자 쌀이며 생필품이 들어오지 않아 굶어 죽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10월1일 대구시민들은 대구역, 대구부청, 대구공회당, 대구경찰서 앞에서 수백 명이 운집하여 쌀값 안정과 교통 통제 해제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민들은 경찰서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해산하라!”

    “일제 경찰 물러가라!”

    시위대와 경찰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시민이 경찰의 발포로 죽은 일이 삽시간에 대구 시내로 퍼져 갔다.

    “경찰이 시민을 죽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들은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이 다시 발포를 하여 시민 18명이 죽었으나 시민들에 의해 경찰서가 점거되고 말았다. 경찰관 2명도 죽임을 당했다.

    흥분한 시민들은 경찰에게서 총과 칼을 빼앗았다. 대구의 시위는 순식간에 대구 전역으로 확대되고 경상북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곳곳에서 파출소와 경찰서가 습격을 받았다.

    시위대는 쌀을 사재기하여 부자가 된 장사꾼들을 습격하고 지주와 부잣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몽둥이로 지주와 부자들을 위협하여 창고를 열어 쌀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0월3일 미군은 대구 경북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대구는 시민들로 인해 곳곳이 불에 타고 친일파와 부자들이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이재영의 가게도 모두 불태워지고 물건을 빼앗겼다. 류관영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집에 있던 아이들은 재빨리 병원으로 달아나 변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은 불에 타고 창고는 텅텅 비었다.

    대구의 시위는 경상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미군정은 남조선 국방경비대,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그들에 의해 대구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쌀값이 결국 이런 사태를 만드는구나.’

    이재영은 탄식했다.

    경찰이 삼엄하게 교통을 통제했기 때문에 10월에는 대구에 내려갈 수 없었다. 11월2일 이재영은 마침내 대구의 병원에 내려갈 수 있었다.

    “어떻게 왔어요?”

    류순영이 놀라서 물었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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