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9월 23일 (월)
전체메뉴

정년 맞는 한 지식노동자가 던지는 말- 이한기(마산대학교 교수)

  • 기사입력 : 2019-08-12 20:26:32
  •   
  • 메인이미지

    “아,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1983년, 아내가 ‘시가 있는 명상노트(문정희 엮음)’란 시집의 뒷면에 이쁜 글씨로 써 두었던 ‘서정주’의 시 ‘신록(新祿)’의 한 구절이다. 2015년 7월경, 나는 우연히 펼쳐 든 낡은 그 시집의 속지에 이쁘게 씌어진 아내의 자필 펜 글을 읽고 적잖이 놀랐었다.

    이렇게 이쁜 시구를 쓰다니…. 의미가 대체 뭐지? 하고 한참 생각했었다.

    이 시구가 시 ‘신록’의 일부임을 그러고도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았다. 그리곤 마치 암호를 해독하여 풀어내 놓은 것처럼 한편으론 의기양양, 한편으론 무지하게(이 시구도 모르다니 하는) 느껴졌었던 당시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갑자기 아내의 처녀시절의 낭만이 멋져 보였고 아름다워졌고, 짧은 우리 연애시절 만날 때마다 시(詩)들을 기차게 줄줄 낭송해주던 26살의 꿈 많던 귀엽고 키 작은 한 처녀가 떠올랐다.

    낭만에 젖던 그것도 잠시…. 지금의 그 사람 모습을 생각하고는 이내 문득 미안해졌다. 나와 살면서 겪어 온 크고 작은 풍파와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행복하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하는 것인즉” 하는 생각에 한동안 그 한 처녀는 나의 마음과 감수성을 센티하게 자극하였었다.

    30여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마다하지 않고 아내란 이름으로, 엄마란 이름으로, 선생이란 이름으로 살아주는 한 처녀가 ‘지금의 모습으로라도 영원히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애뜻한 마음이 내 감성을 사로잡았었다.

    그리곤 나에게도 시간이 그려 그려져서 또 30여년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난다.

    우리에겐 4계절이 있고, 각기 그 의미가 새롭고, 그래서 그 시공들이 ‘신록’의 시구처럼 기차게 느껴진다. 그 기찬 세월을, 그 결코 짧지 않은 시공들을 마산대학교와 함께, 내서(광려천)와 함께 한 35년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다가온 ‘정년이란 이름’이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내 인생에도 한 획이 그려진다. 35년을 몸 담았던 ‘교수’라는 지식노동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나를 내려놓으려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다지 많은 능력을 갖지 못한 나에게 사회는, 학교는 그리고 학생은 너무나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품어 주었고 사람답게 살도록 한껏 보듬어 주었다.

    그다지 큰 업적도 없었기에 세상과 학교에 마냥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며, 이제 나를 선생 아닌, 딴 세상 밖으로 살포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의 공연이 제 아무리 화려했다 할지라도 퇴장하는 배우에게는 다소간의 ‘허탈함’이 남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시 맞이하게 될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이번에는 어떤 빛깔로 다가올지 자못 궁금하며 기다려진다.

    나는 그 새로운 빛깔의 세상을 맞아 어떤 시간들을 그리며 살아가게 될지 설레기까지 한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인생 제2막을 새로운 시간들로 그려가기 위해 행복한 새 길을 나서려 한다.

    “가장 훌룡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라고 말한, 터키의 저항시인 나짐 히크메트(N. Hikmet; A True Travel)의 시구를 되뇌며, 가장 훌륭한 시를 쓰려,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하려고 박수받는 진정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한기 (마산대학교 교수)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