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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 기자의문학 읽기] 성윤석, 2170년 12월 23일

부끄러움과 슬픔 품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
공간에서 시간으로 옮겨 2년간 틈틈이 쓴 시들 묶어
연작시 ‘검은 개인’ 통해 개인의 이중적 특성들 탄식

  • 기사입력 : 2019-09-01 21: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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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시인은 ‘요즘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문학의 바다에 시와 소설이 둥둥 떠다닌다.’ 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침묵 속에서 꾸준히 글을 쓰는 창작자들이 있습니다.

    어설프고 성긴 안목으로 그들의 문학을 알아보고, 읽어내 지면에 싣고자 합니다.

    〈김유경 기자의 문학 읽기〉는 도내 작가나 출향 작가의 신작을 중심으로 작가 나름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거나 뚜렷한 사회적·지역적 메시지를 담은 책을 선정해 비중있게 싣는 코너입니다. 기자가 책을 읽고,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습니다. 드넓은 문학의 바다에서 ‘때때로 싱싱하고 힘있는 문학이 건져올려질 때마다’ 지면을 통해 뵙겠습니다.


    극장(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1996)에서 묘지(공중 묘지, 2007)로, 그리고 다시 어시장(멍게, 2014)에서 화학실(밤의 화학식, 2016)로. 시인의 분방한 행보는 이제 어디로 이어지는가.

    기자가 묻기도 전에 시인 스스로 입을 열었다. “지금껏 공간에서 풍겨나는 것들을 써왔죠. 지역의 특정 장소에 대한 수준 높은 묘사 작업이 필요하다 싶어 이어온 시작(詩作)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의 화학식’ 이후 이제는 공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 시집부터는 공간에서 시간으로 무대를 옮겨왔습니다.”

    제목부터가 ‘2170년 12월 23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년을 훌쩍 넘긴 미래의 어느 추운 겨울날. 무엇을 염두에 둔 날짜냐는 물음에 시인은 ‘아무 의미 없이 제목으로 가져다 썼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대신 시집에 담은 시어마다 흑과 백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뚝뚝 잘라 선명하게 아로새겼다. 2년에 걸쳐 틈틈이 써 묶었다는 이 ‘시간의 시’들은 적어도 기자의 눈에는 시인이 펴낸 시집 중 가장 밀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듯 보인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꼽은 시는 ‘검은 개인’ 연작이다. 시인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만인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만인의 펜과 만인의 마이크를 쥐고 만인을 향해 소리 지른다/(중략)/나는 개인이라서 만인을 경멸하자는 게/아니다 나는 만인이라서 만인을 지긋이 바라보고/그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을 생각한다’고 읊조리고 ‘부끄러운 일을 덮기 위해 또/부끄러운 일을 벌이고/부끄러운 일을 잊기 위해/다시 부끄러운 일을 한다/사업이 그렇고 혁명이 그랬고/문장이 그렇다/지금 이순간/나도 검은 개인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곤 ‘흰 것들은 다 북극으로 가는구나 북극곰 북극흰여우//나 검은 개인/검은 무리가 아니라 검은 개인//검은 것들은 갈 곳이 없구나 검은 곳에선//북쪽을 많이 얘기했던 후배 시인의 장례식장 나 검은 개인/북극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가지고 갈 것은 살아서 꾼 꿈뿐’이라고 탄식한다.

    “개인이 가진 힘이 엄청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인식 속에서 쓴 시들이에요. 이전 같으면 거대한 집단이 가질 만한 영향력을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게 되었달까요. 한 개인이 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거죠. SNS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보아도 그렇죠. 그런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명 우리 모두가 ‘검은 개인’들인 시대. 순정한 시심(詩心)을 가진 시인마저 ‘검은 개인’이 되는 시대. 공간에서 시간으로 시선을 옮긴 시인이 목격한,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충만하면서도 조금은 결핍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창녕 출신인 성윤석 시인은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아프리카, 아프리카’ 외 2편이 당선돼 등단했으며, 시집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 묘지’, ‘멍게’, ‘밤의 화학식’을 펴냈다. 시집 ‘2170년 12월 23일’은 지난 7월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정가 9000원.

    김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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