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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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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작성 박치화, 상해 臨政 활동기록 발굴

임정 법무원 법률판리사 겸 경남도찰리사·재무모집기주원 맡아
생가복원 및 공훈비 건립·하동 독립선언서 문화재 등록 추진 탄력

  • 기사입력 : 2019-09-20 09: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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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9년 3월 하동에서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선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일산(一山) 박치화(朴致和·1880∼1947·하동군 적량면) 선생이 3·1운동 이후에도 상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박치화 선생의 후손이 제공한 자료와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치화 선생 신임장과 통지서에서 선생의 활약상이 담긴 내용을 3·1운동 100년 만에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문건을 분석한 정 소장은 “1927년 10월 상해 임정에서 선생에게 수여한 신임장과 통지서로 임시정부 대통령서리 겸 법무총장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협의를 거쳐 박치화에게 ‘법무원 법률판리사(法律辦理事) 겸 경상남도찰리사(慶尙南道察理使)’와 임정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 등의 직책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다”고 말했다.

    임시정부가 박치화 선생을 법무원 법률판리사겸 경상남도찰리사로 임명하는 신임장.(1927년, 독립기념관 소장)/경남독립운동연구소/
    임시정부가 박치화 선생을 법무원 법률판리사겸 경상남도찰리사로 임명하는 신임장.(1927년, 독립기념관 소장)/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 소장은 “이 직책은 임정의 법무(法務) 군무(軍務) 재무(財務)를 통괄한다”며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중책으로 선생에 대한 신임이 컸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문건은 지난해 3월부터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와 지난달 정재상 소장이 윤상기 군수와 김경수 도지사에게 보낸 박치화 선생 생가 복원과 기념관 및 공훈비 건립,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문화재등록에 관한 서한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박치화 선생의 종손자(從孫子) 박명신(85·부산시 남구 용호동)씨의 자료 제공과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문서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박치화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국권을 회복하자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1947년 7월 5일 지금의 전북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흉탄을 맞고 피살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68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대전국립현충원 제4묘역 117호에 안장했다. 그리고 아우 박문화에게는 1998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제3묘역 470호에 안장했다.

    윤상기 군수는 “이번 문건 발굴은 박치화 선생의 생가복원과 근대문화유산 등록, 공훈비 건립, 독립기념관 건립,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문화재 등록에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연내에 그가 태어나고 살아온 마을에 박치화 지사 공훈비를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익 기자 ji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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