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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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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도(怒濤)- 조광일(수필가)

  • 기사입력 : 2019-09-26 20: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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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 ‘타파’가 남해안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기록적인 강풍과 물폭탄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노도(怒濤)는 방파제를 마구 물어뜯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도 가세했다.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을 몰고 왔다. 지표 위로 추락하는 빗줄기는 ‘신의 단죄’를 받고 천상에서 쫓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창문으로 비바람이 들이치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모습이 흡사 허상을 좇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몽상가를 보는 듯했다. 미끄러져 내리는 빗방울은 둘이 합쳐지기도 하고, 하나로 흐르다가 다시 둘로 갈라지기도 하는 것이 마치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아득바득대다가 이해관계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기를 일삼는 일그러진 군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리배들을 보는 듯해 씁쓸하고 착잡했다.

    부패한 기득권층에 의해 반칙과 특권이 횡행하고 이로 인해 ‘신뢰’라고 하는 사회적 자본이 붕괴되고 있다는 뉴스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겨끔내기로 보도되고 있다. 허구한 날 ‘우리 편이냐 아니냐’, ‘우리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이것을 기준으로 정쟁만 일삼는 사이 민초들은 계층 간 희망 사다리가 무너져 내린다고 아우성이다.

    이런저런 일로 속 시끄럽던 어느 날 오랫동안 허물없이 지냈던 한 후배를 찾게 됐다. 행정처분과 관련해 무슨 조언을 구하고 싶다기에 만났던 거였다. 그는 한때 중소기업인들 사이에서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 있나 싶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기계를 정비하고 있던 후배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신문이 나의 마음을 더 얼어붙게 했다. ‘성장시대의 주역 4050세대가 계층 하락의 미끄럼틀에 올라타기 시작했다’는 대문짝만 한 기사가 그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거였다. 미중 경제전쟁과 일본의 경제보복 등으로 우리 경제가 예측불허의 불안에 휩싸이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불안과 고통으로 지친 모습이 여실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두 손을 겹쳐 눈을 가린 채 이어진 건 탄식의 말이었다. 먹고살기에 바빠 ‘꿈’이라는 말은 꺼내 볼 생각조차 못 하고 살았단다. 갖은 위기의 풍파를 견디며 이제 겨우 빈곤의 고리를 끊어내는가 했는데, 또다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딱하고 짠했다.

    백성은 가난보다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 성난 파도와 같이 들끓어 오르는 민초들의 외침을 듣고 있자니 문득 어느 시인의 죽비 소리 같은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

    조광일(수필가)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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