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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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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 기자의 문학읽기] 서한영교, 두 번째 페미니스트

사람을 사랑하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기록
아내의 임신사실을 안 후부터 일기처럼 쓴 기록 엮어
‘성 대결’ 페미니즘이 아닌 ‘인간의 원형적 사랑’ 담아

  • 기사입력 : 2019-10-04 07:5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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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은 논쟁적이고 민감한, 특히 이성 앞에서 ‘조심해야 하는’ 주제가 되어버린 걸까? 점잖게 시작했던 이야기는 봉(奉)제사와 군대, 육아, 미투 등의 주제를 거치며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끝이 난다.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성(性)대결 구도로, 소위 여혐과 남혐을 부추기는 이론적 진앙지로 자리잡아가는 분위기다.

    기자의 중학생 시절, 또렷한 기억이 하나 있다. 한 친구가 ‘난 페미니스트야. 너 페미니즘이 뭔지 알아?’라고 물었다. 사뭇 도전적이었고, 지기 싫었던 기자는 어디서 읽은 건 있어 ‘일종의 여권신장운동이라고 보면 되지’ 라고 대답한 기억이 있다. 15살부터 페미니스트를 자칭했던 친구는 대학졸업도 전에 집안 좋은 남자와 선을 봐서 결혼을 했고, 3명의 자녀를 둔 전형적인 엄마가 됐다. 이제는 멀어져 버린 친구의 소식을 시시때때로 전해 들으며 기자는 차갑게 조소했다. 페미니즘 좋아하네.

    하지만 시인 서한영교의 책 ‘두 번째 페미니즘’을 읽고, 스스로 만들어 가진 페미니즘에 관한 편협한 사고에 대해 반성해야 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친구를 불러세웠다. 어쩌면 지금의 너야말로, 인간을 여럿 낳아 기르고 인내하고 사랑한 너야말로, 진짜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변모해 있을지 모르겠다고.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시인 서한영교가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안 뒤부터 페이스북에 일기처럼 써내려간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기록’을 한데 엮은 책이다. 아내가 녹내장으로 눈이 멀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을 결심한 일부터 아기를 가지고 낳으며 겪고 느끼고 깨달은 많은 것들을 냉철하게, 슬프게, 아름답게 그렸다. 특히 그가 육아휴직을 내자 직장에서 ‘기다려줄 수 없다’고 통보해 온 일, 친구에게 아이 이야기를 하자 ‘맘충’이라는 말을 들은 일, 어린이집 신청을 하며 보육대란을 겪은 일 등 남성으로 직접 부딪친,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성’은 그를 현장에 있는 페미니스트로 거듭나게 했다. 그러니 이 책은 흔히 우리가 아는 그 논쟁적인 페미니즘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서한영교 작가는 이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라는 시인 심보선의 말을 빌려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질감들 속에서 실현해내는 일을 하는 두 번째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한다’고 읊조린다.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한영교 시인은 창원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에는 의미심장한, 철학적 사유가 곳곳에 배어 있다. 흔한 육아책 대신 사회학자 마가렛 미드의 저서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을 읽으며 아이의 탄생을 기다렸다는 그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그는 남성과 여성을 떠난 ‘인간의 원형적인 사랑’을 곧 페미니즘으로 본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케 한다.

    눈이 멀어가는 아내와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아들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랑, 자신만의 신조를 지키며 꿋꿋이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1983년 마산 출생인 서한영교 작가는 2018년 <동시마중> 51호 신인추천으로 등단했고, 책 ‘붕어빵과 개구멍’을 펴냈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지난 6월 아르테에서 출간됐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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