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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⑬ 치열한 독립운동 펼쳐진 통영

독립운동 목숨 바친 청년·여성들 민중 일깨웠다

  • 기사입력 : 2019-10-31 21: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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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19년 3월 통영, 스무두 살의 진평헌은 독립선언 격문 ‘동포에게 격하노라!’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경성(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에 내려와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독립선언문’을 구하지 못해 직접 쓰게 된 격문이었다.

    격문은 13일 부도정시장(현 중앙시장)에서 계획된 만세시위에서 뿌려질 계획이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게 시위를 주도한 9명 전원이 체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통영의 만세시위는 이를 불씨로 불 붙기 시작했고, 두 달여간 뜨겁게 불타 올랐다. 아마도 이는 격문의 애끓는 주문 때문이지 않았을까.

    ‘행진곡이 시작되었다. 동포여 대도의 거리로 나오려므나, 봉사여 귀먹이여 입 있는 벙어리여 굶주리던 내 동지여 삼천리 내 땅 내 거리 내 형제 내 누이 절통히 죽은 젊은 혼들이여 모조리 나오려므나. 주인이 없었으면 누가 대답하랴.(중략 )이 학살의 거리 총알같은 내 동포여 현재에도 살 수 없고 미래에도 살 수 없는 형제여 어서 바삐 뛰어 나와 이 성스러운 대열에 발 맞추려므나. 하늘도 땅도 청산도 녹수도 가담하리.’(‘동포에게 격하노라’ 중에서)

    ◇여성들, 앞서서 만세를 외치다= 통영 최초의 만세 시위는 3월 13일 유치원 보모들에 의해 시작했다. 진평헌과 함께 3·13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진명유치원 보모 문복숙(당시 16세)과 김순이(당시 16세)는 동지들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됐다. 고민하던 두 사람은 단독으로 시위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장날인 13일 부도정시장 가운데선 두 사람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그녀들이 나눠주는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히 만세를 따라 외쳤다. 일제의 강력한 무력 진압에 시위대는 곧바로 해산됐고, 문복숙과 김순이는 현장에서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옥중의 문복숙은 형리가 옥중 소감을 묻자 지필묵(종이와 붓과 먹)을 달라고 한 뒤 이렇게 썼다.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길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떠 옮기지 못할 것이며,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으나 강철같이 굳센 우리의 마음을 굽힐 수 없다.’

    이들이 지핀 만세운동의 불씨는 통영 곳곳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3월 18일 통영시장 장날 이성철(당시 40세)과 이봉철(당시 35세) 형제가 통영의 두 번째 만세시위를 일으켰고, 그날 밤 서호동에 있던 서당 관란재의 어린 학생 20여명이 서당 아래 주변 시가지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22일과 23일에는 통영면사무소 서기로 일하던 김상진(당시 22세)이 부도정, 길야정 거리 곳곳에 ‘대한국 독립만세! 본월 25일 북장대 집합을 바람. 대한국 독립의 시기다. 오호 대한민족은 일층 마음을 뭉치다. 통영 청년아 결심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살포하다 붙잡혔다. 이어 28일 권오진(당시 21세)은 독립만세를 독려하는 경고문을 통영 시가지 주요 길목에 살포했다. 이어 3월 28일 김재욱(당시 29세), 박성일(당시 25세) 등을 중심으로 150여명의 장꾼들이 조선독립만세 깃발을 휘두르고 만세를 외쳤다. 이후 3월 31일에는 통영면장 앞으로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경고문이 발송되기도 했다.

    통영시 중앙시장 일대 전경.
    통영시 중앙시장 일대 전경.

    열기는 4월 2일 부도정시장의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이날 시위는 고채주(당시 59세)와 박상건(당시 16세)을 중심으로 3000명의 시민들이 모인 통영 최대 규모의 시위로 꼽힌다. 행렬의 제일 앞 줄에는 통영 기생들이 서서 시위를 주도했다. 시위에 앞서 동료 기생들을 은밀히 모아 기생단을 조직한 정막래(당시 21세)와 이소선(당시 20세)은 현장에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2016년 국가기록원이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에 기록된 이국회와 판사의 대화는 유명하다.

    이국회가 죄목을 따지는 일본인 판사에게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와 간부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묻자, 판사가 ‘물론 본부를 섬겨야 옳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국희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는 일입니다’라고 답했고, 결국 판사가 자리를 떴다는 일화다.

    통영시 무전동 원문생활공원에 있는 삼열사비. 3·1만세의거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순국한 고채주, 이학이 열사의 묘비. 삼열사 중 허장완 열사의 묘소와 묘비는 용남면 화삼리에 남아 있다.
    통영시 무전동 원문생활공원에 있는 삼열사비. 3·1만세의거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순국한 고채주, 이학이 열사의 묘비. 삼열사 중 허장완 열사의 묘소와 묘비는 용남면 화삼리에 남아 있다.

    만세운동 후 100년이 흐른 2019년, 수천명이 독립운동만세를 치열하게 외쳤던 부도정 장터는 이제 통영중앙시장으로 변모했다. 관광명소가 된 시장 입구와 버스터미널 등 곳곳에서 유치환과 김춘수의 시(詩)를 만날 수 있었지만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작은 표지석 하나 없는 시장 한쪽, 수소문해 겨우 찾을 수있는 옛 통영우편소 터의 한쪽 붉은 벽돌 벽면이 유일하게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1919년 통영의 독립운동 열사들은 통영우편소를 통해 조선국민독립단 경고문과 독립선언서를 발송했다고 전해진다.

    통영우편소 터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형규 씨는 “20년 전 상가를 살 때 할머님께서 이 장소가 우편소였다고 이야기 해주셨지만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됐다”며 “독립운동이 통영시장에서 큰 규모로 일어났다는 것은 상인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일이고 , 더 많이 알려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통영시 무전동 원문생활공원에 세워져 있는 3·1운동기념비.
    통영시 무전동 원문생활공원에 세워져 있는 3·1운동기념비.

    ◇청년들, 만세운동 이후를 도모하다= 총 6회의 만세의거가 진행되는 동안 통영의 많은 청년들이 투옥되고 고초를 겪었다. 그해 8월 통영 출신 이학이 열사가 교도소에서 사망해 싸늘한 주검으로 통영항으로 돌아오면서 통영 청년들의 울분은 극에 달했다. 청년들은 의거-체포-구금-옥고로이어지는 과정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박봉삼, 임철규, 이영재 등을 중심으로 통영청년단을 결성했다.

    창단 초기에는 일제 탄압을 피해 순회강연으로 지역 사회 문화운동을 확산하며 교육사업과 계몽운동 주요사업을 시행하며 회원을 늘렸고, 창단 3년 만에 400명으로 규모가 확장됐다. 1923년 11월 23일 붉은 독립회관을 준공하고, 문화 보급과 계몽사업을 펼치고 전국순회 활동도 펼쳤다. 또 1927년 일명 ‘김기정 징토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경남도평의회에서 조선인 교육 반대와 조선어 통역 철폐를 주장한 통영출신 평의원 김기정의 친일발언에 대해 민정회를 결성해 규탄 시민대회를 주도한 사건이다. 당시 30명의 통영 청년들이 투옥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청년단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 심해졌고, 통영청년단은 고육지책으로 1930년 이름을 통영청년동맹으로 고쳤지만 결국 강제해산을 당했다.

    통영시 문화동의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1923년 일제강점기때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계몽 운동을 위해 세워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현재 충무고등공민학교로 이용되고 있다./김승권 기자/
    통영시 문화동의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1923년 일제강점기때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계몽 운동을 위해 세워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현재 충무고등공민학교로 이용되고 있다./김승권 기자/

    1923년 청년들의 독립 의지로 만들어진 청년단회관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그 형태로 100년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통영문화원 맞은편에 위치한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은 2002년 등록문화재 제6호로 지정됐고, 현재 공민학교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앞 조그만 표지석에는 ‘구 통영청년단회관’에 대한 짧은 설명이 안내돼 있지만, 당시를 기념할 만한 공간은 없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원장은 “우리나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대부분 건축물이 과거 일제가 만든 공공건축물인데 통영청년단회관 건물은 3·1운동 직후 통영의 청년들이 주도해서 만든 기념비적 건축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이러한 건물의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알리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독립기념 전시관 건립 등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고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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