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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가?- 백승진(경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19-11-25 20: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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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하진 않지만, 가끔씩, (법이) 정의 실현에 기여할 때가 있죠. 그 느낌은 가히 전율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드미 감독의 1993년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앤드류 배킷이 법정에서 자신의 변호사 조 밀러의 “법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유능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변호사 앤드류는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법률회사에 입사하여 중요한 회사 업무를 수행하던 중 고소장을 분실하게 된다. 어렵게 고소장을 찾아 마감 시간에 겨우 맞추어 고소장을 접수시켰으나, 분실 사건 이후 앤드류는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자신이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숨겨왔던 자신의 동성애 성정체성과 자신이 에이즈 감염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생각하는 앤드류는 모든 일이 계획된 사건임을 확신하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배심원들의 판결은 앤드류의 손을 들어줬다. 법이 정의를 실현한 것이다. 법은 당연히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앤드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가 보다.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을 중심으로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우리공화당, 무소속의 일부 국회의원 40명이 지난 12일에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호에 명시된 ‘성적(性的) 지향’ 문구를 삭제해야 한다는 법률 개정안과 “‘성별’이란 개인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고 변경하기 어려운 생래적, 신체적 특징으로서 남성 또는 여성 중의 하나를 말한다”는 신설 조항(제2조 6호)의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앤드류는 고용에서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를 당했기 때문에 법정에서 평등을 강조하며 차별의 시선을 지워버렸는데, 영화보다 26년 뒤에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앤드류를 법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해고하겠다는 포부를 보여주고 있다. 앤드류가 근무했던 법률 회사 임원들의 편견에 근거한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 단계 더 나가서, 미국 여러 주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사생활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남·여 두 개념으로 구분된 화장실을 모든 젠더를 위한 화장실로 개조하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국민의 구성원인 성소수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정치권은 고민해야 한다.

    성소수자들에게 그들의 성정체성은 아침에 옷장을 열고 어느 옷을 입어야 할까 거울을 보며 고민해야 하는 것과 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겐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률개정안 제안 이유를 보면 동성애를 동성 성행위에 초점을 맞춰 부정적인 인식을 극대화하기 위해 ‘성적 만족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동성애자를 쾌락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이성애자는 이런 성적 쾌락에 무심할까? 성 범죄가 묵인돼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다. 이 문제는 행복추구권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 국가의 모든 국민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법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이번 개정안 발의 배경에 보수 성향 개신교가 있다는 보도가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장로교파에 속한 작지 않은 미국 교회에 나가면서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미국 목사가 누가 악마인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여러 대답 중에 동성애자도 있었다. 충분히 예상된 대답이었는데, 이에 대한 목사의 반응이 당시 나에겐 너무나 신선했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현대인들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될 필요가 있으며, 어떤 부분은 재해석은 아니지만 묵인해줘야 할 내용도 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현실 사회 구성원의 인권을 재단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일 것이다. 온갖 추한 모습으로 언론을 장식하는 대형 교회 목회자와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자격 미달 목사들을 볼 때마다 그 목사분이 가끔 생각난다.

    백승진(경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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