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기고] 비움은 채움을 위한 청산- 조광일(수필가)

  • 기사입력 : 2019-11-27 20:23:26
  •   

  • 나무에서 떨어진 단풍잎이 잔잔한 수면에 모여 있다. 곧 바람에 흩어질 가을의 시간을 잠시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은 맑은 호수도 매한가지인 모양, 비움은 곧 채움의 과정이라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억새산행 1번지’로 손꼽히는 영남알프스에 올라 붉은 단풍잎과 은빛 억새꽃이 어우러진 산길을 걸으며 가을의 서정을 오롯이 느끼고 돌아왔다. 하늘과 맞닿은 억새 바닷속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은빛 물결이 여울졌다. 사진 속에 아름다운 추억을 담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한껏 여유롭고 평화스러운 풍경이었다. 기껏 갈바람 쐬는 것만으로도 저토록 행복해하는 소박한 사람들을 보면서, 일상 속에서 작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의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노래,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허밍으로 흥얼거리며 타박타박 걸어 내려오는데 성마른 바람이 내 마음을 흔들고 스쳐 지나갔다. 별안간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쌀쌀한 바람을 타고 산골짝 곳곳에 스며들었다. 여름 내내 그렇게 인색하던 바람이 겨울이 저만큼 다가오자 슬슬 몸을 풀기 시작이라도 한 것이런가. 늦게 피어난 구절초 한두 송이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자연의 변화가 늦가을에만 있는 것이 아니건만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애잔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머지않아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나뭇잎들도 다 떨어지고 산천엔 나목만이 우뚝 서서 찬바람에 가지만 휘휘 날릴 것이다. 겨울이 오면 나무가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리고 건몸을 다는 건 성장을 위한 비움이자 청산이라 했던가. 잎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옹두리 같은 허물과 상처, 명예와 욕심을 다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심지어 자신을 감싸주던 그 잎 하나까지도 낙엽으로 떨어뜨려 자신을 있게 해 준 뿌리로 돌려보낸다. 자연의 순환 이치를 몸소 보여주는 묵언의 철학자 같은 모습에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겨울이 다가오면 한살이를 말끔히 정리하고 봄에 다시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갈잎나무처럼 우리 인생도 재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회되는 순간들, 부스러지고 깨져버린 시간들을 말끔하게 새것으로 고치고 교환하여 새롭게 시작해 볼 텐데…. 인생이란 미리 연습도 할 수 없고 다시 오지 않으니 부서지면 때우고 고장이 나면 고쳐 가면서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거친 바람에 부대끼며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나무는 추위에 떨면서도 재생의 봄을 기약한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때를 맞이하려고 식물도 저렇게 몸에 지닌 것을 모조리 내려놓거늘, 아직도 나는 탐욕과 집착의 겉이파리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부리고 있으니 어쩌면 좋으랴.

    조광일(수필가)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