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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량해전과 이순신- 유명규(글로벌이순신 연구회장)

  • 기사입력 : 2019-12-17 20: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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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 충무공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을 앞두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했다.

    12월 15일은 음력 11월 19일로 이충무공이 전사한 날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시마즈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이순신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의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고니시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50여 척이 파손되어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은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시마즈의 왜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퇴각하였으며 이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이순신 장군은 무인으로서 보기 드물게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 전 발령을 기다리면서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요, 써주지 않으면 야인이 되어 밭갈이하면서 살리라”고 말했다. 노량해전 중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들을 놀라게 하면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

    400년이 지난 지금,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우리 생활 속에 함께 하며 우리들만의 영웅을 벗어나 세계 속의 영웅이 되었다.

    7년 간의 수많은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라사랑 정신에서 나오는 그의 리더십 때문은 아니었을까.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임진왜란사 이순신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데 노량해전 순국 장소와 갑옷을 벗고 적탄을 맞았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은 이순신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을까 의문을 가져보면 임진왜란 이후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을 겪으며 사료가 유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지난 어둠의 과거에서 벗어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충무공을 알면 알수록 애국애족 정신이 강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한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충무공 정신을 제대로 알고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유명규(글로벌이순신 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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