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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⑮ 시위 규모 크고 격렬했던 합천

일제 총검에도 꺾이지 않은 합천의 독립 열기
100년 전 합천, 각계각층 시위 참여
농민·예수교도·유림·학생·승려 등 동참

  • 기사입력 : 2019-12-17 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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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11월 국가기록원은 ‘삼일운동 시 피살자 명부’를 공개했다. 1953년 우리 정부가 조사한 기록이다.

    만세운동 때 일제에 의해 피살된 645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등재돼 있고, 합천 피살자는 4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삼가장터 21명, 초계 10명, 대양 9명 등이다. 주일한국대사관 창고에서 발견된 ‘3·1운동 피살자 명부’에 등재돼 있는 합천지역 피살자 명단에는 삼가장터가 21명으로 가장 많다.(2018년 11월 ‘합천군 3·1독립만세운동 학술대회’ 발표자료)

    이처럼 합천의 독립만세운동은 그 어떤 지역보다 시위 규모가 크고 격렬했다.

    합천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경남신문DB/
    합천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경남신문DB/

    100년 전 합천에서는 농민과 예수교도, 유림, 학생, 승려 등 각계각층이 시위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 관공서에 불을 지르거나 전신주를 무너뜨리는 등 일제 경찰 또는 군대와의 연락을 끊으려 했다. 격렬한 시위 속에 사상자도 많았다.

    기미년(1919년) 3월 18일 삼가면을 시작으로 23일까지 매일 합천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고, 합천읍, 대병면, 초계면, 묘산면, 야로읍, 가야면, 봉산면, 해인사에서 4월까지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다.

    ◇삼가시장 만세와 쌍백면 만세= 서울에 있던 정현상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독립선언서를 고향 쌍백면에 전달했다. 이기복도 이원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하고는 각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 양측에 참여했던 정연표가 만세운동을 합해서 치르기로 하고 거사일을 3월 18일 삼가 장날로 정했다.

    이들은 오전부터 미리 시장으로 가 있었고, 오후가 되면서 군중이 모여들자 정연표가 숨겨 온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은 불타올랐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경찰 주재소를 포위했다. 일제 경찰에 일본인 재향군인까지 합세해 강제해산시켰다. 끝이 아니었다. 닷새 후인 3월 23일 쌍백면에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공사겸과 정원규, 진택현, 오영근, 정치규 등이 군중과 합세해 쌍백면사무소 일대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고, 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수천의 군중은 삼가읍 시장까지 몰려가면서 전신주 2개를 파괴해 일제의 통신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합천 삼가 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탑./김승권 기자/
    합천 삼가 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탑./김승권 기자/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일해공원에 세워져 있는 3·1독립운동기념탑./김승권 기자/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일해공원에 세워져 있는 3·1독립운동기념탑./김승권 기자/

    ◇합천읍 만세= 고종 인산(장례식)에 참석했던 강홍렬은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주경천이 심재기, 심진환, 심재인 등 12명의 동지와 의논해 3월 19일 합천읍 장날에 거사했다. 수백의 군중이 호응했고 일제의 의해 해산됐지만 다음 날인 20일 대양면민들이 합천읍으로 몰려갔다. 읍내 거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전날 구금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일제 경찰이 군중을 위압하자 분개한 군중이 만세를 외치며 들이닥쳤고, 일제가 총을 쏘면서 대응하면서 김영기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대병면 창리 만세= 합천읍에서 20일에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시각 대병면에서는 임상종과 권영두, 권중박, 정시권, 유인수, 권양희, 송헌기 등이 주도적으로 나섰고 창리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성난 군중은 주재소와 대병면사무소에서 기구를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웠다. 일제는 닥치는 대로 총칼로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일본군 헌병대사령부 보고에는 ‘특히 창리에서의 소요는 가장 난폭 낭자를 극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서류 등을 소훼하여 본도 소요 중 함안·군북 소요와 더불어 격렬 흉포한 소요이다’고 기록했다.

    ◇초계면 만세= 초계면의 이원화, 전하선, 성만영, 김덕영 등은 21일 초계리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시장으로 향했다. 장날을 맞아 운집한 군중 사이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초계 우편소를 습격해 기물을 파괴했고 경찰이 총을 발사하면서 김장배 등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묘산면 만세= 윤씨 집성촌인 묘산면 팔심리에서 윤병석과 윤병은, 윤병양이 거사를 도모했고, 22일 인근 마을민이 합세하면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묘산면사무소로 몰려가 본격적인 시위를 벌였고, 당일에 그치지 않고 다음 날인 23일까지도 만세운동이 계속됐다.

    ◇삼가 만세= 3월 18일 합천에서 처음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삼가에서는 23일 또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계획됐다. 윤규현이 지인과 함께 가회면, 쌍백면, 삼가면 등이 연합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했고 드디어 23일 삼가시장에 모였다. 전해지는 기록으로는 1만명이 넘는 군중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김전의, 정방철, 김달희, 임종봉 등이 일본을 규탄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일본 헌병이 임종봉에게 총을 쏘자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갔다. 경찰은 계속해서 총격을 가했고 군중 13명이 즉사하고, 30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삼가시장 만세운동에는 합천에서 백산, 쌍백, 삼가, 가회, 대병, 용주, 대양면 등에서 군중들이 합세했고, 의령군 대의면과 산청군 생비량면에서까지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1만3000명이 시위를 펼친 것으로 기록됐다.

    ◇야로면 만세= 합천군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희생자도 늘어났지만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야로면에서는 박남권이 주도해 문창성 등과 함께 28일 읍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펼쳤다.

    ◇해인사 학생 만세= 당시에도 해인사는 큰 사찰이었고 경내에는 해인보통학교와 해인지방학림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소식이 해인사에도 전해졌고 독립선언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됐다. 3월 31일 해인사 홍하문 밖에 2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경찰의 진압으로 해산한 듯했으나 그날 밤 다시 봉기해 해인사 앞 도로에서 재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해인사 학생들은 자체 봉기에 그치지 않고 통도사와 범어사 등 부산과 김해, 양산, 경주는 물론 함양, 산청, 남원, 서산, 상주, 김천, 성주, 고령, 현풍, 대구 등 사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합천의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4월이 됐지만 가야면과 봉산면 등 합천군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는 계속됐다.

    격렬했던 합천의 독립만세운동. 우연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투쟁, 삼가의병단의 정미의병전쟁(1907~1909년)의 연장선상에 있다. 독립만세운동은 민족계몽운동, 교육운동으로 확대됐다. 1920년 4월 가회면에 사립 구음의숙, 대병면에도 1921년 삼일의숙이, 초계면에서는 정양의숙이 설립돼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지금 합천에는 100년 전 독립운동을 기려 합천읍과 삼가면에 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탑이 세워져있고,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도 지속적으로 열려 그날의 의기를 이어가고 있다.

    차상호 기자 cha83@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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