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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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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해마다 반복되는 한 해의 특이점 ‘동짓날’- 최규하(한국전기연구원 원장)

  • 기사입력 : 2019-12-25 20: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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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노래에 “동짓달 긴긴 밤에” 라는 구절이 나온다. 동짓날은 매년 양력 12월 22일경에 찾아오는데, 올해는 12월 22일 13시 19분이 바로 그때였다. 1년 중 낮이 가장 길면서 밤이 가장 짧은 ‘하지’와는 대조적으로,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순간이 ‘동지’다. 동지의 의미는 하지에서 절정을 이루던 태양의 위세가 가장 약해지는 시점이면서, 한편으로는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는 순간이 겹쳐지는 경계점, 곧 요즘의 표현으로는 특이점인 것이다.

    동지는 태양을 기준으로 한 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이 만나는 시점이란 상징적인 이유로,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도 동지를 설로 삼았다고 한다. 동짓날에는 천지신과 조상의 영을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 군신의 연예(宴禮) 등을 받기도 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여 ‘작은 설’이라 하였는데, 동지가 태양의 부활을 의미하기에 설 다음가는 ‘작은 설’이라는 말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며칠간의 차이가 나지만, 예수 성탄 의식은 3세기부터 행해졌는데, 354년 서방교회가 12월 25일로 그 의식을 행했고, 동방교회도 379년에 이르러 같은 날을 성탄절로 지내왔다. 그 이유는 먼저, 율리우스 달력에서 동짓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과 또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걸쳐 로마시대의 축제일이 있었으며, 그다음 날인 12월 25일은 고대로부터 태양신의 탄생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보급 이후, ‘동지를 지나 3일 뒤 태양 빛이 점점 되살아나는 것이 예수 부활과 같다’ 하여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이어졌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지’는 태양과 아주 깊은 특이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입하면서 특이점이란 표현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여러 의미가 있겠으나, 기술영역에서는 바로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시점을 뜻한다. 그 시점은 곧 다가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변화의 폭이 우리 생각의 범위를 넘을 만큼 클 수 있어 다소 우려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항상 기술의 혁신, 나아가 혁명의 수준에 이를 때면, 직업에서부터 우리의 삶에 큰 변혁이 생기곤 했다. 그 예가 1~4차 산업혁명이라 불렸던 기술적 혁신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기계가 감히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있다면, 터미네이터 등 가상 영화들이 우리 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으면서 증폭된 우려일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올해 4월 8일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신뢰 가능한 AI 윤리 가이드라인’까지 연결되었다. 하지만 알파고가 내로라하는 세계 바둑의 최강자들을 모두 물리쳤다 하더라도 알파고 스스로는 자신이 이겼는지조차도 모른다. 바로 컴퓨터가 사람과 달리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도화된 센서들이나 부품 그리고 첨단 장치들로 무장한 인공지능 로봇이 누군가의 그릇된 의도로 프로그래밍되어 인간을 해친다는 가정 때문에 그런 윤리 가이드가 발표되었으리라.

    해마다 태양의 일광시간을 기준으로 흥망성쇠의 끝자락에 ‘동지’라는 특이점을 두듯이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 속에 어찌 그러한 동지와도 같은 특이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인간이 주도하고 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기술 속에도 이러한 특이점이 필히 존재할 것이다.

    시대의 상황 변화에 둔감하게 살아가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너무 민감하게 우려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얼마 전 동지를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우리 고유의 풍습이 서양의 것에 눌려 잊혀 가고, 사라져 가는 점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 옛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풍습으로부터 최첨단의 기술시대를 살아야 하는 새로운 지혜를 찾을 수 있다면 또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야 그 훌륭한 선조의 훌륭한 후손이라 자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최규하(한국전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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