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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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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을 통해 배우다] (7·끝) 총보다 무서운 식민지 교육

“경쟁 부추기는 식민지 교육 잔재 청산해야”
일제, 우리 민족 ‘공동체의식’ 두려워

  • 기사입력 : 2019-12-30 21: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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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리고 의열단 창단 100주년이 저물어간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각종 기념행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고 싸웠던 선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행사들이 어느 때보다 많았으나, 여전히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어 잊을 것조차 없는 민족이라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는 아우슈비츠 전시관의 경고문이 두려움처럼 다가온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총독은 8명이다. 사이토가 2번의 총독을 했으니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는 9대 총독이었다. 그가 항복하고 조선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일본은 패배하였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과거의 찬란함과 위대함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 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 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상호간에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위대하였고 찬란하였지만, 지금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지 교육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나 아베 노부유키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는 물론 지금 생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말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도 사죄하지 않고,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빌미로 경제전쟁을 일으키는 현재 일본의 행태 때문이다. 그들은 2020년에는 역사상 최고의 방위비를 예산으로 책정하였다. 날로 심각해지는 일본 경제의 어려움을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며 아베 노부유키의 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나만의 우려인가?

    1995년 철거되기 전의 조선총독부./연합뉴스/
    1995년 철거되기 전의 조선총독부./연합뉴스/

    일본은 1912년 조선교육령을 제정하면서부터 우리에게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였다. 민족적 차별이나 감정의 대립을 앞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이 가진 그 어떤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그것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벼농사를 통해 식량을 해결하였기 때문에 혼자만의 노동력으로 이를 해소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두레와 계 등을 통해 공동으로 노동하고 함께 마을의 문제도 해결하는 집단지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와는 반대로 일본은 화산과 지진이 잦기 때문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만을 우선 돌보는 개인주의가 강하였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대한인들이 지닌 공동체 의식을 깨뜨리지 않고는 식민지배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를 파괴하기 위래 그들은 교육 제도 속에 철저한 경쟁을 도입하였다. 언제나 등위를 매겨 상장을 수여하고, 칭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들을 우민화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가 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다. 육지 생물인 토끼와 바다 생물인 거북이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경주를 하는 이 이야기는 모두 다 알고 있다. 동화 속에서는 귀가 아주 예민한 토끼이지만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가 먼저 산 정상에 올라 승리한다. 실제 경주에서는 결코 이기지 못할 경주이지만 이야기 속의 거북이는 승리를 쟁취한다. 이 동화를 읽는 이들은 “너도 거북이처럼 쉬지 않고 노력하면 이길 수 있어, 너만 열심히 하면 돼”라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이 경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경주가 공정하려면 그들은 바다에서 한 번 더 시합을 해야 한다. 그러나 바다 생물이면서 더구나 등에는 무거운 껍질을 짊어진 거북이가 산을 향해 올라가는 경주를 하지만, 아무도 이 경주가 불공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토끼의 게으름을 질책하고 거북이의 성실함을 칭찬한다.

    밀양여고에 근무하던 시절, 한 제자가 독후감 대회에 ‘아기 돼지 삼형제와 늑대’라는 제목의 글을 제출하였다. 고 3이었던 학생이 쓴 글이라 고등학생이 뭐 이런 책을 독후감으로 썼냐며 글을 읽었다. 그 학생은 말하였다. “평화로운 마을에 늑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제대로 된 집을 짓지 않았다 하여 죄인처럼 내몰리는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집을 제대로 만든 셋째를 칭찬하는 것보다 늑대의 잘못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늑대는 외세일 수도 있고 우리 사회의 잘못된 법과 제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공교육을 받는 12년 동안 그 어떤 교사도 나에게 늑대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의 부모마저도 늑대의 잘못보다는 첫째, 둘째 돼지의 잘못만 이야기하였다.”

    그렇다. 나도 그 학생이 말하는 공교육을 담당한 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동안 우리 교육은 공정하지 못한 사회의 제도나 법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냈는가? 아니면 그에 순응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는가?

    일본은 이 땅에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 교육을 심어 놓았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라 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그렇게 서로를 질시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학군 좋은 곳에 살아야 괜찮은 대학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서울 강남의 집값은 상상을 초월하고, 그곳에 살 수 없는 수많은 일반 서민들은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리고 능력 있는 부모가 되지 못함을 자식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경쟁 속에서 하나라도 더 좋은 스펙을 쌓아야 하는 학생들에게 친구는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이 아니다. 이겨야 하는 적일 뿐이다. 이러한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학교에서 조별 평가라도 하려면 1등급의 학생들은 반발한다. 친구로 인해 내 점수가 깎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 공동체 의식은 어떤 의미일까?

    현직 교사로서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입시제도에 대한 우려를 늘 갖고 있다.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지 교육을 탈피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가 필요함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지나면서 더욱 절실히 느낀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이뤄지길 바라면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최필숙(밀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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