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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6) 거제

아주장터 ‘만세운동 불길’ 옥포까지 번졌다

  • 기사입력 : 2020-01-15 07: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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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 대우조선해양 정문 앞, 이곳은 거제의 첫 독립운동인 아주장터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이다. 100년 전엔 독립만세를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지만, 지금은 차디찬 아스팔트와 거대한 조선소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장터는 없어진 지 오래고,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흔적도 없다. 다만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100년이 넘게 ‘여기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거제시 아주동에 있는 거제3·1운동기념탑./성승건 기자/
    거제시 아주동에 있는 거제3·1운동기념탑./성승건 기자/

    △4·3아주장터 만세운동

    거제 만세 운동의 시작은 윤택근(일명 윤일, 당시 28세)과 장승포, 아양, 옥포지역 청년들을 중심으로 계획됐다. 다른 지역에 들불처럼 번진 항일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이들은 4월 1일 이운면 아양리 서당에 모여 대의를 도모했다. 거사일은 장날인 4월 3일로 정했다. 4월 2일 밤, 아주리 이선이 집에 모여 회합을 가지고, 이인수는 이중수와 함께 서양 종이에 ‘대한제국만세’, ‘3일 당등산에서 대한독립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는 격문을 돌렸다.

    애국지사들이 속속 당등산으로 집결했고, 4월 3일 오전 7시30분, 200여명의 민중이 모였다. 윤택근이 앞장섰고, 이공수, 이주근, 이인수, 이주무, 윤사인, 주종찬 등의 주동인물은 지형이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섰다. 윤택근이 선두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참여한 군중들 모두 ‘대한독립 만세’를 당등산이 떠나갈 듯이 외쳤다. 시위대가 아주장터로 내려오자 수많은 군중이 합세했다. 장날에 온 2500명의 주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거제지역 헌병분견소와 송진포 해군방비대, 가조도 해군경비대 등에서 헌병 경찰들이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다. 헌병대가 사격을 시작했지만 비가 내리자 사격은 중단됐다. 큰 시위임에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이유다. 이 틈을 타 주민들이 몸을 숨겼지만, 주종찬과 일부 주민들이 옥포를 향해 가면서 만세를 계속 외쳤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5명이 헌병에게 체포됐다는 일제의 당시 발표와 달리 실제 체포돼 재판을 받은 거제 사람은 모두 9명으로 알려져 있다.

    주종찬 지사 추념비.
    주종찬 지사 추념비.

    △4·6옥포 만세운동

    아주장터에서 시작된 항일운동은 하나의 불씨였다. 불길은 인근 옥포리의 4·6운동으로 이어졌다. 거제에서 두 번째 만세운동이었다.

    이번에는 옥포에서 서당을 하던 주종찬과 천주교 교도들이 중심이 됐다. 4월 5일 옥찬영의 집에 모인 이들은 재차 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날짜는 4월 6일로 정했다. 이들은 대나무를 잘라 종이에 ‘자주수호 대한독립 만세’의 글을 쓴 깃발과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6일 오전 11시. 옥포 중앙에 있는 망덕봉에서 주종찬을 중심으로 한 일행이 옥포리 일대를 행진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주종찬은 큰 깃발을 들고, 서당 학생들은 작은 깃발을 들었다. 인근 주민 200명이 참여해 옥포에서 아주장터로 향했다. 이들은 10리 거리를 걸어서 아주에 있는 이운면사무소를 점거하고, ‘침략자 일본은 물러가라! 친일파 매국노들은 각성하라!’ 고 외쳤다. 이 과정에서 모두 13명이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옛 아주장터였던 대우조선해양 정문./성승건 기자/
    옛 아주장터였던 대우조선해양 정문./성승건 기자/

    △거제 애국지사

    거제에서 발생한 두 차례 만세운동으로 10여명의 애국지사들이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모진 고문에도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버텼다.

    1919년 4월 21일 법원에서 윤택근은 징역 1년을, 이인수와 이주근은 징역 8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윤택근과 이인수는 대구형무소에서, 이주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주종찬은 1919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판사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고 묻자 즉석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일심(一心)’이란 글을 써서 판사에게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주종찬의 행동에 재판이 중단되기까지 했다. 주종찬은 대구형무소에서 나와 거제로 돌아왔지만 고문 후유증과 심한 나병으로 국산마을 뒷산에서 움막생활을 하다 1933년 8월 23일 세상을 떴다.

    이 밖에도 지역마다 소규모의 만세의거는 계속 이어졌다. 또 거제 만세운동 주요 참가자들은 석방 이후 1920년부터 거제 전역에서 청년회를 설립해 항일의식을 높이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들의 활동은 1930년대에는 신간회 거제지회와 거제청년동맹, 거제농민조합 등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아쉬운 거제 독립운동 기념활동

    거제에서는 이 같은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기념사업이 전무한 수준이다. 거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립운동 흔적은 지난 2001년 옛 아주장터가 내려다보이는 아주 3·1운동기념공원과 탑골 거제 3·1운동기념탑이 전부다. 아주 3·1운동기념공원에는 기념탑과 함께 거제 3·1운동 약사를 새긴 비석과 옥포에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주종찬 지사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게다가 거제지역 만세운동 날짜를 두고 갈등이 이어지면서 기념사업의 의미가 퇴색하기도 했다. 아주장터 만세운동을 처음 재연한 단체에서 당시 주동자 판결문에 명시된 사건 일자 ‘4월 3일’을 음력으로 착각하고, 양력 5월 2일로 바꿔서 기념일도 5월 2일로 지정해 행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향토사학계를 중심으로 양력 4월 3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거제시는 2016년 보훈처 질의를 통해 양력 4월 3일로 날짜를 바로잡았다.

    김의부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사는 “타 지역에 비해서 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활동을 너무 등한시하고 있다”이라며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더 늦기 전에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자료를 수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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