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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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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40년 소외 이웃에 무료 이발봉사 산청 김해이용원 김태식 씨

편견 설움 한센인에 손 내민 ‘사랑의 이발사’

  • 기사입력 : 2020-01-30 20: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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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년 문을 연 한센인 공동체 산청 성심원에 외부인이 들어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센인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겪고 살아왔다. 심지어 가족에게 소외되는 경우도 있었다. 성심원의 문은 열려있었지만, 우리 사회는 그곳으로 가는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산청 김해이용원 이발사 김태식(73)씨는 1993년 이발 도구가 든 가방을 들고 경호강을 건너 성심원으로 향했다. 성심원을 찾아 이발 봉사를 한 세월이 꼬박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의 가위질은 그동안 외부인에 단단히 걸어 잠갔던 한센인들의 마음까지 열었다. 김태식씨에게는 성심원으로 오기 위해 건너온 경호강 저편 세상이 더 낯선 곳이 되었다.

    산청군 산청읍에서 김해이용원을 운영하는 김태식씨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래 사진은 김씨가 성모요양병원에서 이발 봉사를 하는 모습./성승건 기자/
    산청군 산청읍에서 김해이용원을 운영하는 김태식씨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성승건 기자/

    성심원과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청이 고향인 그는 20여년간 부산에 살다가 건강 악화로 귀향해 1973년 김해이용원을 차렸다. 상호에 ‘김해’가 들어가지만, 특별한 인연은 없다. 건물주가 1층에 김해식육점, 김해식당, 김해상회를 운영했는데, 그의 이용원 간판에도 자연스레 김해라는 단어를 새겼다.

    김해이용원은 터미널 주변 목 좋은 곳에 있었다. 터미널은 산청읍을 드나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터미널을 택해 개업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터미널 근처는 거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로 매일 시끌벅적했다. 뱀을 잡으러 다니는 땅꾼, 먹을 것이 없는 걸인, 상이용사들까지 다양했다. 그들 중에는 너덧 명의 한센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김씨는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읍내를 돌아다니는 한센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사지도, 씻지도, 머리를 깎지도 못했다. 따듯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이발해주려 해도 당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상의 편견 때문에 드러내 놓고 할 수는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김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용원 커튼을 치고 그들의 머리를 정리했다. 이발을 하고 돌아갈 때면 그들에게 밥 한두 끼 먹을 정도의 돈도 건넸다. 그는 5년 동안이나 한센인 이발사를 자처했다.

    그러나 두꺼운 커튼도 모든 것을 가리지는 못했다. 밤마다 한센인을 대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읍내에 퍼져 손님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이용원 문을 닫는 것까지 고려할 상황까지 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센인들과 만남을 이어갔다.

    김씨가 본격적으로 한센인 공동체 성심원에 들어간 것은 1993년부터다. 산청군 위생담당 공무원이 성심원의 이용 봉사를 제안했고, 그는 가깝고도 먼 성심원의 땅을 처음 밟았다. 외부인이 출입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는 처음 성심원에 들어간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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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산청읍에서 김해이용원을 운영하는 김태식씨. /성승건 기자/

    “첫 방문이라 나름대로 선물을 준비한 게 음료수였어요. 뚜껑이 있는 박카스, 베지밀을 양손 가득 준비했어요. 그런데 환자들이 뚜껑을 따지 못해 음료병을 바닥에 떨어뜨렸죠. 아차 싶었습니다. 양손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제야 다시 생각이 나더라고요.”

    성심원에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한센인이 있었다. 당시 500명에 가까운 한센인이 모여 생활했다. 어림잡아 온종일 가위질을 한다 해도 70~80명밖에 할 수 없었다. 혼자서 1년 가까이 이발 봉사를 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원이었다. 가위질은 한정되어 있었고, 기다리는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봉사자가 더 필요했다. 그는 당시 한국이용사회 산청군지부 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긴 설득 끝에 회원들은 한센인을 받아들였고 10여명의 이·미용 봉사대가 꾸려졌다.

    “설득하는데 1년 정도 걸렸어요. 제가 먼저 한센병에 대한 정보도 찾고 공부하면서 회원들에게 충분히 이해시켜야 했어요. ‘우리는 특별한 기술을 가졌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성심원에 있다’는 말로 회원들을 설득했고, 흔쾌히 동참해줬어요. 편견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죠.”

    김씨의 봉사는 성심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1982년부터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성심인애원, 산청 고려성모요양원, 산청복음전문요양원, 산청읍 복지회관 등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있는 곳,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이발 가방을 들고 어디든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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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요양병원에서 이발 봉사를 하는 김태식씨.

    “노숙인에게 거처를 마련해 준 일, 홀로 월남한 노인을 돌본 일, 먹을 것을 훔치다 수감된 이웃의 삼남매를 보살핀 일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에는 ‘봉사’라는 말이 굉장히 생소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봉사였던 것 같아요.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나눠줬지만, 저는 그들에게 더 값진 선물을 받았고 꾸준히 봉사를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어요.”

    김해이용원의 유일한 휴일은 일요일이다. 그러나 김씨는 휴식 대신 봉사를 택했다. 채비를 하고 나갈 때면 어김없이 아내와 네 명의 어린 자녀가 마음에 걸렸다. 가정보다는 봉사에 몰두했고, 돈과도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아내, 아이들과 함께 변변한 가족여행 한번 가지 못한 게 정말 미안했죠. 지척에 병풍 같은 산들도 많았지만 한번 오르지도 못했어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저를 이해해주기 시작했어요. 이제 자녀들은 안부 전화 첫 마디를 ‘이번 주는 어디로 봉사 가세요?’라고 물을 정도예요. 가족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남을 돕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왜 이발사를 택했냐’는 질문에 김씨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가 열여섯 살 때였다. 아버지 나이 쉰 초반, 가족도 모르는 사이 뇌졸중이 찾아왔다. 형들은 모두 군대에 가고 김씨가 아버지를 돌봤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덥수룩해진 머리를 정리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곳저곳을 수소문했다. 손수 집까지 찾아와 이발해줄 사람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결국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평소 하얀 가운을 입고 있어 마음속으로 동경했던 분들에게 거절을 당하니 더 울컥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이발사가 되겠다고.”

    남들 눈에 띄려고 봉사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세상이 먼저 그를 알아봤다. 김씨는 2012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2017년 아산상을 받았다. 한센인 봉사, 4500여명에 달하는 농촌 고령 노인 이발 봉사, 소년소녀 가구 성금 지원 등의 정량적인 지표보다는 그의 꾸준함이 상을 받게 된 계기가 됐다. 아산상을 받았을 때는 제법 넉넉한 상금도 받았다. 빠듯한 생활비에 보태쓸 법도 했지만, 상금은 또다시 성심원으로, 김씨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로 건네졌다.

    김씨는 봉사를 나설 때 이발 가방과 함께 챙겨야 하는 한 가지가 더 생겼다. 그는 3년 전부터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 한센인, 노인들에게 음악을 전하기 위해서다. 이제 몇 곡을 불어낼 수 있는 실력도 충분히 갖춰졌다.

    김태식씨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그의 나이를 50대로 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산청읍내에서도 소문난 동안 외모로 소문나 있지만, 그의 나이는 칠순을 넘겼다. 건강해 보이는 김씨지만 직업 탓인지 허리, 어깨가 아파 이제는 자주 병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봉사는 멈출 수가 없다. 주변에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김씨 역시 그들이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뻔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봉사하는 게 목표예요. 그들이 느끼고 있는 슬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을 나누다 보면 어느덧 제가 그곳의 한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봉사가 제게 더 값진 선물을 주는 만큼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 또 제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려 합니다.”

    박기원 기자 pkw@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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