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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7) 거창

총검도 막지 못한 장기리시장·위천장터 만세 함성

  • 기사입력 : 2020-02-11 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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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창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그날의 역사를 온전히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만세운동도 새롭게 고증돼 주목을 받는다. 거창으로 퍼진 독립운동 함성은 지금껏 우리가 알아온 것보다 더 컸다.

    ◇거창에 남은 곽종석 선생의 족적=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거창군 가북면 다전마을에 면우 곽종석 선생의 유허지를 복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생 후손들과 주민들이 그 당위성을 줄기차게 알려온 것이 결실을 봤다. 거창군은 “늦게나마 자체 사업 선정으로 자칫 잊힐 뻔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가북면 다전마을에 있는 면우 곽종석 선생 유허지.
    가북면 다전마을에 있는 면우 곽종석 선생 유허지.

    가북면 다전마을은 현재 유허지가 복원되진 않았다. 다만 곽종석 선생의 흔적은 유적비 등으로 찾을 수 있다. 곽종석은 1919년 137인의 유림대표로 이곳 다전마을에서 한국독립청원서를 최종 검토한 뒤 제자인 김창숙 선생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1846년 산청 출생인 곽종석은 그가 이룬 업적으로 고향인 산청에서 큰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 거창은 곽종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독립운동과 관련해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는 1896년 51세 때부터 이곳 다전마을로 이주해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03년 이곳에 빈객과 문생을 들이는 여재(如齋)를 짓고, 1915년에는 학생들을 수용하려 여재(如齋)의 동쪽으로 인재(寅齋)를 마련했다.

    거창군은 이달까지 유허지 복원을 위한 실시설계를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 이르면 올해 안 여재와 인재 등을 복원한다. 나아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유품 등을 모아 전시나 기념관을 짓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다전마을을 독립운동 성지이자 유림운동의 본거지로 재조명하겠다는 것이다.

    ◇일제와 맞선 3000명의 군민들= 거창에서 가장 컸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과 22일 가조와 가북주민 3000여명이 일어난 시위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3년 3월 기미독립만세기념탑이 섰다. 만세운동은 가북면 김병직과 가조면 어명준이 주도했다.

    전국 의거의 민족함성을 전해 듣고 가조면에서 민족의 의기를 높이 들 것을 의논해 거사를 3월 20일 장기리시장 장날로 약정했다. 장날 정오경이 되자 400~500명(일군경 기록 약 300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두 사람은 시장 중앙으로 잠입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도 일제히 호응하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곤 두 사람이 시위대열에서 빠져나와 가북면에 있는 용산의 일군헌병분견소로 달려가 일헌병의 문부를 찢어 버리고 기물을 모조리 파손한 후 의자에 앉아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일군 헌병들은 장기리 시장으로 출동한 후라 이곳에 없었다.

    헌병과 보조원은 주동 인물 5, 6명을 묶어 밤늦게 돌아왔다. 두 사람은 이들에 대항했으나 총검을 가진 다수 일군을 당해 낼 수 없어 반죽음 상태가 되어 다음날 아침 거창 일군헌병대로 압송됐다. 이 소식이 지역민들에 전해지자 애국 유지들은 서로가 연락해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 아래에 모여 비밀회의를 갖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은 22일 거창읍 장날에 거사키로 하고 위원 6인을 선출해 가조·가북면을 비롯한 각처 애국 군중들에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한다.

    선출된 6인 위원은 오문현·신병희·어명우·어명철·이병홍·김호 등으로 밤을 새워가며 책임을 완수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정보가 누설되어 22일 아침 주동 인물 김채환·김호·오문현·어명철·최영순이 일군헌병분대에 끌려가 취조를 당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가조면·가북면 농민 약 3000명(일군 기록 약 2000명)이 오후 2시 30분께 각자 곤봉을 가지고 독립만세라 특필한 기치를 만도정(晩嶋亭) 앞에 세운 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이들은 주동 인물들을 구출해 행렬을 이루고 거창읍으로 향한다. 시위행렬이 사포현에 이르렀을 때 이미 거창 일군헌병대와 용산 일 헌병분견대는 합세해 군중의 진로를 차단하고 총포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명했다. 군중은 응하지 않고 일제히 일군 헌병을 향해 돌진했다. 이때 포진했던 일 헌병이 총격을 가해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

    거창군 가조면 기미독립만세기념탑./성승건 기자/
    거창군 가조면 기미독립만세기념탑./성승건 기자/

    ◇체포되는 순간에도 외친 독립만세= 아울러 거창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이 4월 8일 위천·마리·북상면 주민들이 위천장터에서 만세를 외친 것이다. 이곳엔 ‘3·1독립운동기념비’가 위천면사무소 건너편으로 1985년 세워졌다가 작고 초라해 2009년 같은 자리로 다시 세워졌다.

    위천면에선 1919년 4월 8일 위천 장날에 유희탁, 정대필이 주동이 되고 유한탁과 이형준 등이 합세해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들이 거사일 정오 위천 장꾼들 사이를 오가며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쳐대니, 삽시간에 장터 군중도 사방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고 가두시위를 계속하니 일본 헌병은 총검으로 맞서 무수한 양민을 구타하고 체포했다. 일본 헌병의 주동자 색출이 이어질 때 유희탁과 정대필은 “내가 주동자다”라 호통치며 앞장섰고,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으니 방면하라고 소리쳤다. 이들은 체포되어 가는 중에도 ‘독립만세’를 연호했으며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거창군 위천면사무소 옆 3·1독립운동기념비.
    거창군 위천면사무소 옆 3·1독립운동기념비.

    ◇더 밝혀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 “지금까지 거창 3·1만세운동은 가조와 위천의 만세시위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일제 관헌 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밖에 많은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창읍, 남상면, 거창 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은 이 사료에서 처음 밝히는 사실이다.” 3·1운동 100주년 때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함께하는 거창 공동대표)가 ‘3·1운동 100주년 기념 거창평화축전’ 학술심포지엄에서 ‘거창의 3·1운동’이란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밝힌 내용이다.

    그는 일제 관헌 사료로 ‘조선 소요사건 경과 알림표’ 등을 분석한 결과, 거창의 만세운동은 6건이며 여기에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고증된 위천면 만세운동을 더하면 7건이 된다 밝혔다. 7건 중 4건은 그간 날짜나 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1919년 3월 15일 거창읍, 3월 24일 남상면 대산리, 4월 3일 거창공립보통학교, 위천면 고현장에서 각각 만세운동을 계획했다가 발각됐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신용균 연구교수는 “거창의 만세운동은 연구논문이 한 편도 없고 최초 연구라는 점을 고려해 관련 사료를 결집하고 기존 재검토했다.

    남아 있는 사료 분량은 적은 편으로 일제 관헌 자료는 단순 보고서가 대부분이며 우리의 자료는 거의 없었다”며 “일제 관헌 사료는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므로 기재된 사건은 최소한의 사실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 연구자들의 시선이 군 단위까지 못 미쳐 왔다”며 “우리의 독립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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