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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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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금과 틈 사이- 오영민 (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20-02-20 20: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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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릴까? 아님 그냥 두고 화분 받침대라도 쓸까? 여러 번 들었다 놨다 금간 접시를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20년을 훌쩍 넘겼으니 너도 나처럼 때론 아프다 아프다 말을 못하고 그 상처 한줄 금으로 또렷이 남아 나이 값을 하는 구나. 정이 들면 버릴 것도 못 버리고 안고 살아야 되는 줄 정작 알았지만, 옛말에 깨지고, 금간 그릇은 집에 두면 안된다하여 자꾸 접시 하나를 두고 망설이는 내가 참 묘하다. 차라리 어느 날 툭 떨어져 먼저 나를 외면하고 깨져버렸다면 쉽게 버릴 수 있었을 것을 금간 접시와 나 사이에 틈이란 게 있었나보다. 그 틈새에 새긴 정이 이렇듯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어 쉽게 인연 줄을 끊지 못하나 보다.

    내가 시집도 가기 전에 친정엄마는 큰딸 몫으로 차곡차곡 접시와 그릇들을 사다 놓으시곤 큰딸 시집갈 때 보낼 거라고 꽃무늬 가득한 하얀 접시며 밥그릇 국그릇이며 냄비까지 죄다 모아 놓으셨다.

    틈틈이 사다놓고 바라보며 흐뭇해하던 그 모습이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에게는 참으로 난처한 일들이었지만, 나는 그 그릇들을 고스란히 내 몫으로 챙겨왔으니, 나에게는 득템 아닌가?

    식구 많은 집 외며느리 되었으니 그 그릇들은 참으로 크고 값지게 지금도 제 역할들을 충분히 하고 있다. 살아보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 살아보니 몸으로 다 읽어지는 여자로의 삶이란 것이 금간 그릇 하나에도 내 상처인 듯 보이는 것을 엄마는 그렇게 알려주고 싶었나보다.

    사는 일이 때때로 거품처럼 부글거리고 잦은 바람에도 뼈가 시린 날들이 생기고 바람 잘 날 없다는 것을 일러주기라도 하듯 나도 그렇게 금을 그어가고 틈을 메워가는 중인가보다.

    행주를 삶고 한잔 커피를 내리는 아침 문득, 엎어진 유리잔 속 얼비친 나의 모습을 본다. 흰머리 하나 또 틈새로 자라나고, 작은 주름 하나가 눈가에 또 금으로 그어지고 그것이 삶인 듯, 시간은 익숙하게 딸아이들이 커가는 모습만큼 엄마의 뒤안길에서 다시 나도 엄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준비해 놓은 것은 없으나 시대가 좋아져서 더 좋은 것들이 자꾸 만들어지는 요즘에야 미리 금을 긋고 틈을 주는 일들은 하지 않아도 좋을듯하여 다림질을 하듯 나의 딸들은 시간의 주름들을 잘 펴 나가리라 믿어본다.

    꽃무늬 접시처럼 곧 다가올 꽃들의 잔치, 해묵은 묵정밭에서 피워 올리는 냉이 같은 봄은 늘 마지막 겨울의 틈을 비집고 꽃으로 피어나는 기적을 보여준다. “꽃길만 걷자”는 말을 유행어로 격려로 인사로 나누는 요즘에, 금간 접시처럼 나누어진 너와 나의 세상들이 수많은 금들로 그어진 요즘에, 살기 위한 몸부림들이 참으로 처절하게 뉴스거리로 판치는 요즘에, 무덤덤하게 꽃길을 걷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다 어쩌다가 무지개보다 더 선명한 색깔들의 옷을 입고 우리는 꽃들의 시간표를 짜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세상은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고, 지혜의 샘은 늘 목마르지 않을 만큼 샘솟을 것이라 믿으며, 먼저 걸어 온 길 만큼 걸어가야 할 길 위에서 나는 꽃길만 걸을 수 있는 기적을 내 몫으로 담아 본다.

    살면서 세어볼 일이 꼭 지갑 속만은 아니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으니함부로 그어둔 금간 것들에게서 이제는 가끔 삭제버튼을 누르기도 해야겠다.

    오영민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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