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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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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이 아픈 봄이 꽃이 되자고-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 기사입력 : 2020-03-09 20: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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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이다. 만물이 생동한다는 경칩마저 지났으니 완연한 봄이다. 그러나 그저 오는 봄은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엄동설한에 전멸한 생명들을 되살리려니 마땅히 얼마나 산통이 크겠는가. 그럼에도 올봄은 남다르게 아프다.

    만세운동 뻗치던 3월 1일 아침 - 나는 상대를 봐가며 대적하지 않는 101년 전 그런 운동을 믿지 않는다. 짐승에겐 짐승의 방식으로. 거국적 저항동력의 마지막 불씨를 발로 걷어차고 이후 26년의 암흑 속으로 내던진 헛된 그 지도력을 믿지 않는다-에 파랗게날 언덕 ‘달그림재-앙월’ 마당에 백매 홍매가 한 그루인 매화나무를 심고 제멋대로 뻗친 가지를 쳐주며 생각한다.

    건청궁 장안당 마당의 매화는 화사한 조선의 왕비가 어둠 속 일본 낭인들에 머리채 낚여 마당으로 내팽개쳐져 차마 못할 욕보이고 그 몸뚱아리 불태워질 때 메이는 피울음 그 목구멍에 얼마나 토했을꼬. 그래도 나라인데 총 한번 쏘질 못하고 518년 사직을 통째 이민족에 넘겨 고스란히 넘어가 구중궁궐 담 너머로 들려오던 만세소리들인지 비명소리들인지 가물가물하던 쉰 목소리들 얼마나 귀기울였을꼬.

    비탈엔 배롱나무 네 그루를 심는다. 배롱은 조선의 선비들이 가장 좋아한 나무라고 하지 않던가. 껍질로 치장하지 않고 속살이듯 드러낸 줄기가 겉이나 속이나 앞이나 뒤나 똑같아, 표리부동의 어지러운 세태를 꼬집는다는.

    경칩 다음날, 그 언덕에 산수유나무를 심으며, 떠나신 ‘늙은 혁명가’를 생각한다. 한학을 통해 인간의 깊이를 가르쳐주신, 여전히 나의 일천함을 돌아보게 하시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긴 돌풍 속을 헤쳐간 파노라마 같은 삶이, 20여 년 만에 찾은 수몰 직전의 고향을 이렇게 쓰셨다.

    “스산한 겨울 끝자락에서 유달리 일찍 핀 산수유는 내게 고향의 마지막 봄을 유일하게 채색해준 추억의 꽃으로 남아 있다. 생명이 다한 임종의 마을에서 다시금 살아나는 봄, 생명을 지키고 열매를 맺겠다는 희망을 향한 무언의 의지를 나는 보았다.”

    툇마루에 내려앉는 따사로운 볕을 느끼며 꽃향기 사람향기를 그릴 즈음, 이 봄에 불쑥 찾아온 ‘크라운 바이러스’를 생각한다. 봄날의 시련. 미처 몰랐던 무엇이 무엇이던가? 어딘가에 어긋났음이라.

    우리는 제동장치 풀린 질주를 해왔다. 오로지 잘 먹고 잘 살자며 달려왔다. 인간이 즐기고 버린 쓰레기들은 산과 들 곳곳에 하루아침에 산을 이루었고, 얕은 물 깊은 바다 가릴 것 없이 생명들의 아가미까지 미세스티로폼으로 질식하게 하였으며, 내뱉는 배설물은 파란 대기를 덮어버렸다. 뭇 생명의 터 지구는 전방위적인 임종에 다가서고 있다. 지구멸망시계는 숨가쁘다. “14일간 빙하 8억t이 녹았다”라는 기사도 이제 놀랍지 않다. 지구 빙하기로부터 간빙기까지 1만 년 간 지구 평균온도 상승보다 산업화 이후 최근 100년 동안의 상승속도가 25배 가파르다. 바이러스와 대적하느라 지치기 이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멸종이 먼저 닥쳐오리라는 경고음이다.

    스산한 봄날은 우리더러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멈추고 돌아보라고 한다. 코로나19의 창궐은 “사회적 거리두기”뿐 아니라 ‘폭주 멈추기’의 기회를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다울 것인가? 뿔난 바이러스와 조우하여 만만찮은 화두와 맞닥뜨렸다.

    그러나 늘 그렇듯 위기는 기회의 손을 끌며 함께 오지 않던가. 이런 봄 아니면 어디서 번뜩할 것인가? 이 지구에 인간만이 살고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귀하다. 인간도 그 조화 속에 하나임을 사려 깊은 지혜로 이 봄을 넘긴다면, 인류가 나아가는 어찌 새 이정표가 아니 되겠는가! 이 아픈 봄이 꽃이 되어 이듬해 홍매 백매 나란히 꽃그늘 질 때 찾아오는 벗이 있어 그 아래 돗자리 깔고 마주 술잔에 꽃잎 떨어뜨려 볼까 하고.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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