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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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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15의거 60돌 (중) 3·15의거와 4·19혁명

‘4·19혁명 과정’ 아닌 민주화운동 효시

  • 기사입력 : 2020-03-15 2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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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날은 1960년 3월 15일, 바로 3·15의거가 일어난 날이다.

    자유·민주·정의를 기본 정신으로 시민들이 스스로 시작한 이날 의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첫 발걸음이었다. 3·15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위상은 여타 민주운동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하지만 지난 2010년 3·15의거 기념일이 4·19혁명 기념일과 별개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3·15의거는 4·19혁명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법적으로도 독립적인 의거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권력욕에 반기=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정·부통령선거에서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3·15부정선거가 일어난 데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3월 15일 선거당일 투표를 개시하기 전 △3인이 조를 이뤄 투표장에 투입 △4할 사전투표 △공무원 경찰 관권 동원한 공포분위기 조성 △부정선거 획책 △공개투표 △대리투표 등 온갖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은 ‘협잡선거 물리치자’는 등 구호를 외치며 항의했다. 3·15의거는 4월혁명으로 가는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김주열 열사 시신 ‘기폭제’= 이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 김주열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르면서 3·15의거는 새 국면을 맞았다. 3월 15일 제1차 마산의거에 이어 4월 11일부터 3일동안 두 번째로 시민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1차 의거 이후 경찰은 청년·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해 데모 주동자나 방화범으로 조작하려 했으며, 나아가 공산당 지하조직에 의한 좌익폭동 세력으로 몰고가려 했다.

    그러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어진 제2차 의거 때는 마산시내 8개 고등학교가 조직적으로 항거했다. 이에 자극받은 고려대학교 대학생 4000여명은 4월 18일 마산사태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촉구하면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귀가 중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50여명의 학생들이 중경상을 입게 되면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급기야 4월 26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4월 29일 미국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김주열군을 사살한 경찰을 학생에게 맡겨라”는 피켓을 들고 마산경찰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마산상고 시위대 모습./3.15의거기념사업회/
    “김주열군을 사살한 경찰을 학생에게 맡겨라”는 피켓을 들고 마산경찰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마산상고 시위대 모습./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 마산에서 시작된 3·15의거는 이후에 일어난 4·18, 4·19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3·15의거는 4·19혁명의 머리이자 몸통’이라는 주장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15의거는 현재 의거로서의 독립적·법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94년 3월 1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3·15의거로 공식 천명했지만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의거’로 규정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4·19혁명을 의거로 격하하고 3·15의거는 아예 삭제하는 등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정당성이 폄하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나 이후 2009년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결의안’이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3·15의거가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혁명, 자유, 정의, 민중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갈 기념적인 날로 인정받았다. 그 결과 2010년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2003년에는 3·15의거 희생자 묘지도 국립3·15민주묘지로 격상됐다. 올해부터는 약 120억원을 투입해 창원시 민주주의전당을 건립할 계획이다.

    3·15의거의 희생 있었기에 4·19혁명이 있고,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2020년 대한민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누리게 한 초석은 ‘3·15의거’이다.

    △3·15의거 희생자 명예회복 서둘러야= 이춘우 3·15의거학생동지회 사무국장은 “3·15의거 당시 12명이 희생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저항을 시작한 날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부터다. 당시 8개 고교생들이 일어나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시내를 3일간 행진을 하면서 ‘3·15부정선거규탄’을 외쳤고. 이후 4·18, 4·19로 이어졌다”며 “하지만 3·15의거는 4·19에 가려져 제대로 인정을 못받고 있다.

    당시 주역들은 나이가 80이 다 됐다. 이들이 3·15의거 주역이라는 명예를 회복할 기회도 얼마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ylee77@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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