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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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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음의 방역, 트로트- 조광일(수필가)

  • 기사입력 : 2020-03-19 20: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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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스·미스터 트롯의 흥행이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꼭두새벽까지 TV 앞에 눌어붙듯 앉아 트롯 무대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트로트는 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대물림되는, 비주류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음악 장르로 분류된다. 청량한 가사, 구성진 가락은 굴곡진 삶을 꿋꿋이 살아내는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정서적 동반자라고나 할까. 고향에 대한 절절한 애수를 달래주는가 하면, 작별 인사를 건네는 어머니가 몰래 눈물을 훔치던 그 시절 황톳빛 서정을 되살려 준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에 아파하고 막막한 삶에 허덕이는 중년들의 서럽고 답답한 심사에 공명하며 위안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트로트의 한과 흥은 도전자들의 인생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출연자들의 성장 뒤에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사연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수로 늙어 온 홀어머니와 할머니 품에서 자라면서 꿈을 키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생활을 해야 했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스승의 도움으로 인생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도 있었다.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가 곁을 떠나면서 조부모 손에서 자란 열세 살 소년 J군도 출생부터가 험난하고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그 많은 시련 다 이겨내고, 할아버지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잘 자라줘서 고맙다. 그리고 끝까지 못 지켜줘서 미안하다.”는 조부의 영상 편지가 방영될 때엔 곁에 있는 아내가 볼세라, 눈가에 번지는 물기를 숨기기 위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도 못했다.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대한민국을 울렸지 싶다.

    대체 무엇이 우리 사회를 트로트 열풍 속으로 빠져들게 한 것일까. 폭스트로트(fox-trot)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라고 한다. 말하자면 국권을 강탈 당해 사회에서 배제되고 무시되면서 무기력해진 패배감과 억눌린 한(恨)이 그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트로트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대중을 사로잡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불확실한 미래, 위태로운 경제, 무너진 계층 사다리 등으로 인한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가 트로트를 만나면서 꾹꾹 눌러 담아뒀던 감정이 촉발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막걸리 한 잔’, ‘울긴 왜 울어’,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로 답답했던 속을 풀어내기도 하고, ‘보랏빛 엽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고맙소’, ‘울면서 후회 하네’와 같은 인간 관계성에 대한 슬픈 정서를 담고 있는 곡조에 대중이 한껏 고무되는 걸 보면.

    코로나 사태로 일상이 멈추거나 바뀌면서 불안, 슬픔, 충격에 사로잡혀 있다. 이 시름들을 트로트가 다독여줬다. 그 무엇보다 큰 위안과 힘을 건네준 ‘마음의 방역’이었던 것이다. 트로트 파이팅!

    조광일(수필가)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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