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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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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쿠이 말로- 허성원(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 기사입력 : 2020-04-19 20: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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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대전 때의 사진 한 장이 있다. 병사들이 서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떨어져 이동하고 있고, 그 중 한 병사는 당나귀를 업었다. 왜 업었을까? 당나귀를 너무도 좋아해서일까? 그건 아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은 지뢰밭이다. 누가 지뢰를 밟으면 전 부대에 치명적이다. 당나귀는 네 발을 가졌으니 더 위험하다. 중요한 수송수단이라 버리고 갈 수 없으니 선발된 한 병사가 부득이 업은 것이다.

    우리의 사회나 조직에는 어디나 ‘당나귀’가 있다. 조직의 안전을 심히 위협하지만 버리거나 피할 수 없는 짐이다. 반드시 조직 내 누군가는 원하든 원치 않든 떠맡아야 한다. 대체로 조직의 리더나 강한 사람이 맡지만 때로는 오히려 약한 사람이 덤터기 쓰기도 한다. ‘당나귀’를 잘 피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환경의 사람도 있다. 그리고 당나귀에 따라서는 너무 무겁거나 별나게 요동을 쳐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유독 약한 자의 등만 골라서 업히려는 녀석도 있다. 업은 사람이 당나귀를 감당하지 못하면 낭패다. 그곳은 지뢰밭이다.

    지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 사태도 ‘당나귀’와 같다. ‘코로나 당나귀’가 운 없는 사람들의 등에 올라탔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 등에서 내린 당나귀들이 세계의 지뢰밭을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돌아다니고 있는 형국이다.

    코로나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는 미국 시카고에서는 사망자의 72%가 흑인이라고 한다. 흑인의 인구 대비 사망자가 과도히 높다. 전염병과 같은 대환란은 그들과 같은 약자에게 더 치명적이다. 약자는 생존을 위해 더 많이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초기에 특정 종교단체 때문에 된통 애를 먹었었다. 그 종교단체의 추종자들이 비난이나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그들도 허황된 교리에 기대어 삶의 위안을 찾고자 했던 그저 소외된 약자들이었다.

    세상은 무수한 인간 고리들로 이어진 사슬과 같다. 강한 고리도 있고 약한 고리도 있다. 전쟁이나 질병과 같은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약한 고리가 가장 먼저 끊어진다. 약한 고리가 끊어지면 남은 고리가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존재를 온전히 누리거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지금 대혼란을 겪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이 바로 약한 고리들이 곳곳에서 이미 끊어져버린 상태이다.

    기업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산업구조는 개별 기업들을 고리로 하여 이루어진 가치 사슬이다. 지금의 대환란이 가져온 ‘불경기 당나귀’는 가장 취약한 기업의 등에 올라타 그들의 진행이나 생존을 버겁게 한다. 일부 기업이 감당하지 못한 당나귀는 국가 경제의 지뢰밭을 마구 날뛰며 돌아다닐 것이다. 이미 당나귀에 굴복한 기업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런 대환란의 시기에는 사람이든 기업이든 약한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사회의 가치 사슬이 유지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누가 가장 취약한지 혹은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지 찾아야 한다. 범죄 용의자를 찾을 때에는 그 범죄로 인해 ‘누구에게 가장 유리한가?’를 확인한다. 이를 라틴어 ‘쿠이 보노(Cui bono)’라 한다. 그러나 환란의 시기에는 그 반대의 주체인 약자 혹은 피해자를 찾아야 한다. 이를 ‘쿠이 보노’에 상대되는 개념의 라틴어로 ‘쿠이 말로(Cui Malo)’라 부르기로 하자.

    ‘쿠이 말로’ 즉 ‘누가 가장 불리한가?’를 묻는 것은 성숙한 사회의 기초 조건이다. 모두가 힘들 때 가장 불리한 처지의 사람을 우선적으로 따뜻이 배려하는 것이다. 이를 맥시민(Maximin) 혹은 ‘최소수혜자 배려’의 원칙이라 한다. 이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그들이 쓰러지기 전에 찾아서, 보듬고 보살피며 힘을 보태어 짐을 덜어야 한다. 더 지체할 수 없다. 지금 함께 외치자. 쿠이 말로!

    허성원(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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