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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정오복(문화생활팀장)

  • 기사입력 : 2020-06-07 20: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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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패배·굴욕·복종을 의미한다. 중세 유럽, 교황에 무릎 꿇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노사의 굴욕’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겐 병자호란 항복 의식이 된 ‘삼전도의 굴욕’이 아픈 역사로 남아 있다. 인조는 무릎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세 번이나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했다.

    ▼반면 무릎 꿇기는 사과의 의미도 포함한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을 찾아 나치의 만행을 무릎 꿇고 사죄했다. 이 장면은 폴란드 국민감정을 움직였고, 유럽 외교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국내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 장남의 5·18민주묘지 참배를 견줘볼 수 있다. 역사적 평가까지는 아직 성급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가족, 80년 신군부 실세들의 행보와는 큰 차이를 보이면서 그나마 위안이 된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죽은 흑인 ‘플로이드 사건’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층 결집에 이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상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에 항거하는 ‘무릎 꿇기’ 시위로 폭발하고 있다. 시위는 코로나19의 엄혹함 속에서도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등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트럼프를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무릎 꿇기는 패배나 굴욕이 아닌, 강력한 저항으로 작용하면서 트럼프에게는 오히려 지지율 역전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카노사의 굴욕은 반전이었다. 이 사건으로 교황은 쇠퇴하고, 황제는 정치적 실리는 챙겼다. 근년 들어 국내에서 발생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땅콩 회항, 백화점 갑질 모녀 사건, 특수학교 학부모들의 무릎 꿇기는 개인적인 수모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무릎을 꿇는 것은 나만의 굴욕이 아니라, 공동체의 수치라는 메시지로 전이되면서 여론의 저항을 일으켰다. 약자의 무릎 꿇기가 당장은 한낱 주먹만도 못한 권력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역전은 머지않았다.

    정오복(문화생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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