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기고] 자동차가 말하다- 이문섭(국민연금 창원지사 가입추진팀장)

  • 기사입력 : 2020-06-16 20:21:03
  •   
  • 이문섭 국민연금 창원지사 가입추진팀장

    32만5000㎞. 오래된 내 차의 누적 운행거리다. 지구 한 바퀴의 거리가 대충 4만㎞라 하니 지구를 여덟 바퀴 이상 돈 셈이다. 오래 탔다. 차를 살 때 초등학생이던 애들은 훌쩍 커서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다. 차도 나도 한창 일 때는 내처 열 시간 이상을 달리는 강행군을 견뎌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차는 이런저런 자잘한 사고와 고장으로 온몸에 연륜을 새겨 넣었다. 이미 폐차처리하거나 중고시장에 팔아버려야 했을 차를 지금까지 타고 다니는 나를 보고 누구는 미련하다 할 것이고, 또 누구는 검소하다 할 것이다. 새 차가 물론 좋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굳이 차를 당장 바꾸어야 할 이유를 찾아 낼 수 없었다. 차를 오래 타면 당연히 생기는 소소한 흠집이나 고장, 예컨대 사이드미러의 전동 모터가 고장 나서 손으로 접어야 한다거나 오르막에서 출력이 떨어져 노인네처럼 힘겨워한다거나 하는 정도는 퇴행성관절염처럼 자연스런 것일 뿐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어서 그냥 지금까지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원래가 물건을 빨리빨리 새것으로 바꿔 버릇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쓰기 시작한 물건은 오래 쓰고, 오래 쓰다 보니 물건에 대해서 애착을 뛰어넘어 정서적 교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차가 그런 경우였다. 내 차는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승용차보다 넓다보니 웬만한 자취방 이삿짐은 용달을 부를 필요 없이 실어나를 수 있었다. 얼마 전 애들이 자취하면서 생긴 짐을 잔뜩 싣고 서울에서 집까지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요긴하게 활용했다. 무거운 책과 생활용품을 빼곡하게 채우고 아내와 나를 태운 차가 만만찮은 거리를 달려 진해의 장복터널을 넘어 진해 입구 고가도로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고가도로 시작 지점이 약간 오르막임에도 차는 나는 듯이 가볍게 차고 올랐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우리 차도 자기 동네 오니 다시 힘이 나는 모양이네.” 오래된 물건과 교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낯선 거리에서는 주춤거리다가도 막상 익숙한 동네에서는 기운이 되살아나는 그런 기분을 차도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집 앞까지 무사히 도착했을 때 나는 자동차의 핸들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말했다. “얘야, 고생 많았다. 덕분에 잘 다녀왔다.” 그때 나는 문득 환청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먼 길을 달려와 힘들어하는 엔진소리를 낮춰 가르릉거리면서 자동차가 한 말이었다. 순간 나는 이 오래된 쇳덩어리에 대해 표현하기 어려운 애정을 느꼈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오래된 차에 대한 감정이 이럴진대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정작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감정하게 대해 왔었는가 하는 돌연한 회한과 반성이었다.

    시청에서 오래된 차를 조기 폐차하면 지원금을 준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먼 길을 건너온 이 노인과 같은 차와 조금 더 함께 하기로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자동차로부터 들은 그 말은 환청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정든 주인의 따뜻한 말에 반응한 자동차 최초의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문섭(국민연금 창원지사 가입추진팀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