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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창녕 영산호국공원은 적폐 대상이 아니다- 조정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국협의회 회장)

  • 기사입력 : 2020-08-30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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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란공신 전제(全霽)는 1591년 무과 별시을과에 급제하여 첨정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합천에서 창의해 낙동강 및 경상도 지역 여러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참전 승전했으며, 1596년 대구 팔공산전투에서 결사구국을 회맹(會盟)했다. 그 전공으로 1597년 선조로부터 영산현감을 제수받았다. 그해 7월 초 의병을 모아 영산전투와 박진전투에서 대승했으며 동년 7월 21일 경상좌도 방어사 곽재우 휘하 조전장으로 화왕산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전해 대승했다. 또한 정암전투와 구진산성전투 등에서도 선봉장으로 출정해 승전한 임란 호국공신이었다.

    1597년 12월 26일 권율장군 휘하 도산(울산)전투에 출정해 종군하던 중 논죄(論罪)되어 그의 전공을 시기한 권율장군 휘하 독찰관 이사종에 의해 억울하게 참형되었다. 그후 공의 억울한 죽음을 통절한 첨지 배대유의 상소로 무고함이 규명되었다.

    1982년 초 창녕군에서는 창녕현지의 충절기록에 근거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전제현감의 전공을 재조명하는 ‘靈山縣監全霽將軍忠節事蹟碑(영산현감전제장군충절사적비)’를 건립했다. 이 때 기존 3·1운동기념비 및 6·25 전적비, 그리고 주변 소도읍(영산)정비사업 등을 아우르는 영산호국공원이 1982년 5월 31일 준공되었다. 하지만 1988년 7월 1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기거할 때 일요신문에 전제현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13대 선조라는 명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전제가 현감 재임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으로 도피했으며 정유재란 시 울산전투에서 도망갔다가 독찰관 이사종의 칼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의 영산현감은 황정복이며 그 5년 뒤인 1597년 초에 전제가 영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정유재란을 맞아 화왕산전투, 박진전투, 정암전투 등에서 선봉장으로 참전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선조실록, 망우당집, 영수실기 등에 있다. 위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뜻이다. 도산전투가 벌어진 1597년 12월, 전제의 선봉장 전공을 시기하던 자에 의해 즉결 참살됐지만 전제는 임란시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호국충신으로서 달아난 적이 없으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상고되어, 1880년(고종17년) 신원이 복원되고 호조참판에 증직 되었다.(창녕현지, 모정집, 영수실기)

    따라서 1982년 5월 31일 영산호국공원에 건립된 전제장군충절사적비는 역사왜곡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20년 7월, 또다시 진보당 경남도당과 적폐청산과 민주사회건설 경남운동본부가 주도하는 학살자 전두환 기념물 철거와 적폐청산 대상에 영산호국공원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역사기록에 무지와 편견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으로 필자는 그 진상을 사료에 근거해 소상히 밝히면서 영산호국공원을 적폐로 몰아 철거하는 것은 역사파괴이자 임란공신에 대한 모독임을 명백히 밝히는 바이다.

    조정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국협의회 회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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