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간이역] 꽃들- 문태준
- 기사입력 : 2020-09-17 0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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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 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 나가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유독 꽃집이 많은 모스크바 거리를 상상해 봅니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추운 날씨겠죠. 코트 깃을 세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다가 문득, 꽃집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순간, 환해지는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스물네 시간 불 켜진 꽃집이 그들을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꽃들의 짧은 꽃 시절을 생각한다면 밤이라고 그냥 흘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그 ‘꽃’이라는 말의 꼿꼿한 ‘ㅗ모음’이야 말할 것도 없이 좋지만, 아들이나 딸처럼 ‘ㄹ’을 함께 데리고 오는 ‘꽃들’ 만큼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들판에서 방목하며 키운 짙은 야생의 향기와 해 질 무렵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들의 양순함이 두루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밥 먹어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멀리서 들립니다. 꽃들을 두루 보살피시던 유년의 꽃집에도 늘 불이 켜져 있습니다. 유희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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