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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받아둔 물 - 주선화

  • 기사입력 : 2020-09-24 08: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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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물은

    전날 받아둔 물로 한다


    미리 받아둔

    순한 물이다

    화를 가라앉힌 물이다


    찻물이나

    화분에 물을 주어도

    순한 물을 쓴다


    순해지는 나이를 지나고 보니


    두둑한 땅 아래로만 흐르는

    이랑 물인 거 같고


    나는 여전히 악,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넌지시 바보 소리나 듣는

    그저 그렇게 받아둔 물인 거 같고


    ☞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있다. 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작은 힘이라도 계속해 보탠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러한 물의 본질적 힘을 우리는 지난여름 긴 장마로 경험을 했고, 아픔 또한 겪었다.

    그런데 마음이 순해지는 나이에 접어든 시인은 ‘화(힘)를 가라앉힌 물’로써 가족과 지인들을 위한 밥을 짓고 차를 달이는 한편, 온갖 꽃과 열매가 맺어지게 될 화분에도 주고 있다.

    두둑한 땅 아래로 흐르는 이랑 물 같이 ‘악’하고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곰삭은 세월의 무게를 전날 받아둔 순한 물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대자연의 분노(憤怒)와 불안하고 시끄럽기 그지없는 정국(政局)의 연속선상(連屬線上)인 요즘, 우리 모두에게 정제(精製)된 물로써 그동안 찌들었던 마음을 씻고 맑은 영혼을 한번쯤 들여다보게 하고 있다. 강신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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