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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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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의령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전형수(전 경남도 법무담당관)

  • 기사입력 : 2020-10-05 20: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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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은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경남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지명을 살펴보면 마땅할 의(宜) 편안할 녕(寧)으로 의령의 최고봉인 자굴산 자락에서 그저 욕심없이 풀 뜯어 소 먹이고 농사지어 먹고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터전이었다.

    사람새는 어질고 선한 심성에 인정이 있는 유목민이었으나 나라가 환란이었던 1592년(임진년) 국방을 해야 할 정규군이 혼비백산 도주하는 상황에서 유생의 신분이었던 망우당 (곽재우 장군)께서는 단기 필마로 국내 최초의 의병 봉기를 통해 왜군과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켜 내셨다. 또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 강점기엔 독립 운동에 앞장서신 백산(안희제 선생)은 만고의 충신이자 우리시대의 선각자이셨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 의령은 명실공히 충의의 고장이라 불리지 않았던가.

    이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이시자 우리말 지키기에 앞장서셨던 고루(이극로 박사)와 동양의 철인(哲人)이신 한뫼(안호상박사) 그리고 오늘날 글로벌 기업을 창업하신 호암(이병철 선생) 등 걸출한 위인들께서 시대별로 나타나셔서 의령의 위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필자는 아무 한 일 없이도 그저 의령인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로 살아왔고 또한 오래 전 우연한 기회에 한뫼(안호상) 박사의 강연을 들은 바 있는데 말씀 중 한 가지만 인용하자면 의령을 중심으로 진양(지금의 진주), 합천, 산청, 함안, 창녕 등지의 지역에선 의령의 처녀들이 규수감으로 으뜸이라 의령으로 장가드는 것을 큰 영광으로 선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령인의 기풍이 그러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우리 의령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담함을 넘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러한 좋은 전통을 지키고 가꾸어야 할 책무와 군민을 위무해야 할 방백으로 선임된 자들이 줄줄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 또 선거 땐 “얼마면 당선 또 얼마면 낙선”이란 말이 회자된다고 하니 심히 유감이다.

    그러함에도 옳고 그름의 분별이 없고 아전인수와 위록지마로 혼란을 부추기는 현실을 탄하노라.

    필자는 생업을 위해 고향 의령을 등진 지 이미 50여 성상을 훌쩍 넘긴지라 그저 먼발치에서 간간이 전해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 제발 다음에는 현자의 등장으로 일그러진 상처가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때 왕성했던 30만 내외군민의 활기찬 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는 딱 한 가지.

    필자가 태어나고 잔뼈가 굵어진 아련한 추억이 머무는 곳이기도 한 그곳이 충(忠)과 의(義)를 따르고 티없는 삶이 이어지는 의령다운 의령으로 자리매김되기를 소망하며 언젠가 생을 마감하는 날 대대로 조상님들께서 잠들어 계시는 선산발치에 한 평 남짓한 유택을 얻고 싶어서이다.

    전형수(전 경남도 법무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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