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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설국, 한계령 그리고 겨울나무- 이서린(시인)

  • 기사입력 : 2021-01-14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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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1899~1972)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눈 내리는 풍경이 드문 남쪽 도시에 살았던, 열여덟 살의 내가 만났던 일본 소설과의 첫 만남이었다. ‘설국’이라니. 눈의 더미로 쌓인 풍경이라니. 그 설렘과 ‘설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동경이 새삼 생각나는 요즘이다.

    며칠 전 새벽부터 내린 눈에 마당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앞산과 먼 산도 흰빛이었다. 집 뒤가 산이고 앞이 논밭인 우리 마을은 북면에서도 좀 추운 곳. 마당에 나갈 때도 털모자에 털신, 목도리를 감아야 했다. 추워서 개집에서 꼼짝도 안 하던 녀석들은 주인이 나오자 꼬리 치며 마당의 눈을 밟고 뛰어다녔다. 아무도 없는 마을길에 신나게 발자국을 찍다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흔드는 꼬리들. 나도 덩달아 신이 나 눈 쌓인 풍경을 휴대폰에 몇 장 담은 후, 마을 어르신들 넘어질세라 우리 집과 옆집 앞의 눈을 쓸었다.

    집에 들어와 TV를 켜니 온 나라가 한파와 폭설에 제대로 겨울을 목격하고 겪고 당황하는 중이었다. 비행기는 결항 되고 바닷물도 얼고, 보일러가 터지고 물이 나오지 않고. 뉴스에서는 나라 곳곳이 북극발 한파로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경남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눈 쌓인 풍경을 마루 통유리 창으로 내다보며 커피를 내렸다. ‘설국’에 이어서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가 떠올랐다. 해마다 겨울이면 내리지 않는 눈을 기다리며 읊조리던 시.

    ‘오오, 눈부신 고립’이라 외치며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하고 바라는 그 마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라며 차라리 구조되지 않기를 바라는 애끓음.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배고픔도, 추위와 어둠의 공포도 그와의 이별보다 두렵지는 않다. 시의 화자는 짧지만 단 며칠,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애가 타면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을까. ‘눈부신 고립’을 벗어나면 헤어져야 하는 현실을, 잠시라도 폭설에 갇힌 채 잊고 싶은 것이다. 그 짧은 축복에 감사하면서.

    ‘설국’은 결국 이별을 이야기하고 ‘한계령을 위한 연가’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눈 내린 세상을 보며 추운 현실보다 아직 사랑이 먼저 생각나는 나는 철없는 어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폭설 속에 갇혀 봤으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같이 있는 것. 사랑을 나누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서로의 체온으로 온기를 더하는, 겨울은 사랑을 나누기에 좋은 계절이다.

    제주도에 사는 시인이 보낸 풍경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눈에 파묻힌 시인의 집이 부럽다고 답신을 보냈다.

    겨울이 좋다. 지금이 겨울이라서가 아니고 나는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꽁꽁 언 벌판과 겨울 산과 겨울나무가 좋다. 심한 동상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도 겨울은 겨울다워야 신난다. 진해 출신으로 동요를 가장 잘 부르는 어른, 가수 이성원의 ‘겨울나무’를 듣는다. 잎 하나 없이 완강하게 서 있는 나무의 결연함과 고독함. 눈 내린 들을 보며, 마을 입구 느티나무의 휘파람을 듣는다.

    이서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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