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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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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유서를 쓰다-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 기사입력 : 2021-01-18 20: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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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망졸망 자라오다 하나둘 객지로 떠나고 외할머니만 홀로 남아 지키던 양각산 아래 시골집엘, 학창 시절에 책을 싸들고 내려가 은둔하듯 묵곤 했다. 백 미터 주파하듯 하던 서울의 시간관 다른 흐름이 그곳에 있었다. 오솔길을 흐르던 시간. 시골의 여름밤, 들녘에 융단처럼 내리 깔린 안개 위로 은은히 쏟아져 내리는 별과 달의 파편들, 신발을 벗어 들고 걷는 신작로의 맨발에 전해지는 온기…….

    지치고 시든 영혼이 시골의 청량한 숨쉬기로 생기를 되찾을 즈음 어느 날 삽짝문을 들어서다 방둑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그 할망구가 떠났어. 저어기로…….” 지팡이를 들어 앞 산 언덕을 가리킨다. 때도 없이 찾아와 아궁이 앞에 나란히 앉아 세상 모든 소식을 나르던 앞집 할머니가 홀연 떠난 것이었다. 어둑해지도록 망부석처럼 먼 산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옆모습은 내 뇌리에 풍경처럼 남았다. 허물어지듯 내려가면 언제든 반기던 할머니는 이제 거기 없다.

    소한과 대한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새싹이던 것이 가랑잎으로 구르고 낙엽진 자리에 머잖아 파랗게 싹 돋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무수한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을 지켜보면서 젊은 날의 민감한 감응이 많이도 무뎌졌다. 보지 말아야 할 것, 겪지 않아야 할 것 들을 거듭 접하면서 촉이 망가진 것일까? 살아가는 의미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이 생이 얼마나 고귀한 일회성인지, 포착 못하는 것은 아닌지.

    스물다섯 초겨울이던가, 거창에서 버스를 타고 김천역에서 기차에 올라 저녁노을이 내릴 즈음 용산역에 막 들 때의 차창밖 한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스모그로 몽롱한 해거름 대기 속에 또렷하게 빛을 발하던 가로등 불빛이 왜 순간순간 되살아날까? 이제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들어 다부지게 분투해야 한다는 비장감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강산이 몇 번 바뀌고 내 나이도 그 두 배를 더 산 2021년 초입에 누마루가 근사한 고택을 탐방코자, 완전히 떠난 그 도시를 다시 찾았다. 이젠 거창에서 무쏘를 몰고 김천구미역에서 KTX에 올라 코로나19 사태로 뭔가 경황없는 서울역에 내린다.

    독립문 앞에서 버스를 타고 무악재를 넘어 녹번, 불광, 연신내, 그리고 진관사 입구까지 차창밖으로 스치는 낯익은 도회지의 무채색 겨울 풍경이 감회가 깊다. 저 거리를 함께 거닐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복통으로 밤새 뒤척이다 새벽 2시 눈을 떠, 광화문대로와 경복궁, 푸른 기와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숙소 20층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이 고요하다.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졌으되 그 창조주가 홀연 떠나도 무심히 깜빡이는 저 거대한 피조물들은 그리움을 알까. 불빛이 꺼져도 콘크리트 덩치는 건재하구나. 창에 비친 나도 하나의 불빛. 지금 뜻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내 삶의 결정자는 나. 이제 건네고픈 말 ‘유서’를 써 품에 안고 다녀야겠다. 존엄한 마무리, 시신기증서와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도 이참에 써야겠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진리. ‘이 별에서의 삶은 누구나 유한하다.’ 가슴 저리던 그도 떠났고 사랑에 겨워하던 그도 떠났다. 내 곁에 영원하리라던 어머니도 만물이 소생한다는 경칩에 생을 달리해 눈 덮인 땅 속에 누워 무엇을 헤아리고 있을까? 눈시울이 젖어온다. 영원한 것이 없다. 이 순간에 몰두해야 한다.

    2021년 첫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강좌’(Daum 검색창에 ‘파랗게날’로 검색)로, ‘웰 다잉’을 듣게 되었으니, 귀 기울일 일이 많다.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다〉. 선한 시작이 선한 마무리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애써 아름답게 살아야겠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인가.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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