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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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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③ 이병철과 지수초등학교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③ 이병철과 지수초등학교
열세 살에 고향 떠나 진주로 유학… 지수초 3학년 편입

  • 기사입력 : 2021-07-15 21: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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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철이 12살이 되었다. 집안에서는 이병철을 서당에서 배우는 것을 중단시키고 신식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도록 결정했다.

    1920년대는 비교적 큰 면사무소 단위로 일본식 신식학교 즉, 초등학교 과정의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한문 공부를 중단하고 신식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이병철은 어디로 진학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문공부 중단하고 초등학교 진학 결심
    시집간 누나집서 6개월간 학교 다녀
    1학기 마치고 서울 외가댁 근처로 전학

    매형 허순구, 진주 최초 백화점 세워
    대구 삼성상회 설립·국악 발전 기여도

    당시 이병철의 집이 있는 정곡면에는 학교가 설립되지 않았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의령읍내에는 1910년 개교된 의령초등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정곡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50리길로, 걸어서 통학하는 것은 매우 먼거리이다. 조금 더 멀리 보면 진주 시내에 몇 개의 학교가 있었지만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가 부모의 보살핌도 필요한 나이인데 친척이나 형제가 없는 곳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시집간 누나 집 근처에 있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였다. 이병철의 형제자매는 위로 형과 누나 두명, 모두 2남 2녀이다. 둘째 누나 이분시가 지수면 출신 허순구와 결혼하여 지수에 살고 있었다. 이병철은 시집간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하고 13살이 되던 해인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지금의 초등학교는 8살에 입학을 하고 13살이면 6학년 졸업반 나이가 된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20~1930년대는 학교 교육정책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다. 초등학교 1학년에 15살 입학생이 있는가 하면, 농사를 짓다가 20살이 될 때 신식학문을 배우러 온 경우도 있다. 심지어 삼촌과 조카가 같은 학년으로 공부한 사례도 많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는 조혼풍습이 남아있어 LG그룹의 구인회 회장과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은 결혼을 하고 초등학교 과정에 다닌 집안의 가장이자 동시에 초등학생이었다.

    이병철이 지수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생활한 매형 허순구 고택. 왼쪽엔 이병철과 지수초에서 함께 공부했던 구인회의 고택이 보인다./경남신문 DB/
    이병철이 지수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생활한 매형 허순구 고택. 왼쪽엔 이병철과 지수초에서 함께 공부했던 구인회의 고택이 보인다./경남신문 DB/

    서당에 다니던 이병철의 두발은 유교 집안의 전통 그대로 댕기머리였다. 신식학교에 입학조건의 하나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었다. 이병철 역시 서당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손수 땋아 주셨던 긴 머리를 지수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잘라버렸다. 의령 중교리보다 큰 마을인 진주 지수면과 지수보통학교의 생활을 매우 만족하게 보냈다. 그 소회를 이병철은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다”고 하였다.

    이병철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 중교리에 머물던 중 서울에서 내려온 재종형을 만났다. 재종형으로부터 서울 이야기를 들은 이병철은 서울로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을 하고 서울 가회동 외가댁에서 멀지 않은 수송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이병철의 지수초등학교 인연은 1922년 3월 3학년 편입부터 9월까지 약 6개월 정도 재학한 것이 전부이다. 이 시기 초등학교는 4년제이다. 이병철이 전학을 가지 않고 계속 다녔다면 지수면 출신 구인회 LG그룹 회장과 함께 1924년 4월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된다.

    지수초 전경. 1921년 개교 당시에는 1층 단층이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그 후 신축했다./연암재단/
    지수초 전경. 1921년 개교 당시에는 1층 단층이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그 후 신축했다./연암재단/

    그리고 1923년에는 이병철이 태어난 의령 정곡면 집 앞에도 정곡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 이병철이 1년만 늦게 소학교에 진학해 1923년에 개교한 정곡공립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다면 이병철의 사업철학과 사람과의 인연은 어떻게 흘렀을까? 만약 이병철이 서울로 전학을 가지 않고 정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가서 학교를 다녔다면 이병철의 세상을 보는 시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연은 이렇게 순간적이거나 운명적으로 만들어지고 비껴가는 것 같다.

    # 이병철과 부인 박두을에 대한 구전

    인연과 운명과 관련, 이병철과 부인 박두을 여사에 관한 구전이 각각 한가지씩 있다. 이병철이 서당에서 한자를 배우던 시기에 부친을 만나러 온 유명한 관상가가 이병철이 노는 모습을 보고 “이 아이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것 같소. 학문 외 다른 분야에서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니 이 아이가 하는 대로 지켜보시오”라고 했다.

    이병철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경북 달성군에 살고 있는 박두을(1907~2000) 여사와 결혼했다. 박팽년 후손들의 집성촌인 달성군 하빈면에 한옥마을과 박두을 여사 고택부지가 있다. 이곳 고택 부지에는 “구전에 의하면 유년 시절 여사의 관상을 본 한 스님이 왕비가 아니면 거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라고 한 안내 표지판이 있다.

    # 달성군 하빈마을과 박준규 국회의장

    9선의 국회의원과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최초로 국회의장을 세 번이나 한 박준규(1925~2014)가 달성군 하빈면 출신이다. 이곳은 박팽년 후손이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한옥마을이 예사롭지 않다. 마을 입구부터 밝은 기운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필자의 글재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으니 독자 여러분이 직접 가서 보고 판단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병철의 부인 박두을은 박준규의 당고모이다. 당시 박준규의 아버지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이병철이 대구에서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 어머니 박두을 여사가 “의령으로 시집을 와서 보니 네 아버지(이병철) 살림이 너무 작다”고 하였다. 이병철 집안도 의령의 천석꾼인데, 이 살림을 보고 작다고 하였으니 달성군 하빈면 박씨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허순구와 진주 경제사

    이병철의 누나 이분시와 결혼한 매형 허순구(1903~1978)는 1922년 3월부터 그해 9월까지 지수초등학교 3학년인 처남 이병철을 데리고 함께 생활했다. 허순구는 일반 대중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걸어온 길을 보면 실로 엄청나다. 허순구는 한국의 국악계는 물론 대구, 진주의 경제사를 비롯, 삼성의 기업사, 한국 경제사에 빠트릴 수 없는 기록을 가진 분이다. 1927년 진주에 백화점의 효시인 문성당백화점을 운영했다. 그 후 대구로 가서 처남 이병철과 함께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대구 삼성상회 설립을 주도했다. 대구 풍국주정공업을 운영했고 부산 삼성물산공사,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삼성그룹의 기업설립에 많은 역할을 했다. 제일제당 설립 발기인으로 10%의 인수주권을 가질 정도로 재력 있는 사업가였다. 인생 후반부는 대구에서 국악 관련 풍류방을 운영하면서, 국악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 소장한 국악 악기와 악보 유품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풍류가이자 문화선각자로 한국의 국악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세 아들 중 차남 허병천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대학 재학 시 옆자리에 앉아 함께 공부한 친구이다.

    서봉 허순구가 편찬한 국악보./이병천/
    서봉 허순구가 편찬한 국악보./이병천/
    허순구가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경주 최부자가 사용한 거문고./국립국악원/
    허순구가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경주 최부자가 사용한 거문고./국립국악원/

    <이병철의 한마디>?경험은 돈으로 구입할 수 없다. 실패한 경험도 중요하다. 왜 실패를 하였는지 반드시 분석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패한 경험도 언젠가 소중한 경험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 래 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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