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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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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벼루에 먹을 가는 시간이다- 윤영미(서예가)

  • 기사입력 : 2021-07-19 20: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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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절 혼돈 속에 코로나19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로 인해 2차, 3차 미칠 아찔함에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며 하룻밤 뜬눈으로 보냈다. 다행히 음성이라는 문자가 떴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밀접 접촉자의 자가격리 돌입이다. 보건소에서 보내오는 물품과 문자들, 그리고 함께 가슴 졸였을 지인들과의 통화를 끝내고 테두리 공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기억해 냈다. 다행히 나에게는 전원(田園)에 작업실이라는 넓은 일상의 공간이 있다. 서예가였기를 참 잘했다고 여겼다.

    차일피일 미뤄왔던 작업들을 꺼내 비로소 시작할 시간이다. 위기에 이기적 긍정주의가 빛을 발했다. 닥치면 그 순간부터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시키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자가격리 동안 서예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려면 시동 거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붓을 드는 순간부터야 금방이겠지만 그 직전까지는 고민하는 예술가의 시간이다. 밥을 먹을 때도 차를 마실 때도 누군가와 교류할 때도 온통, 머리는 또 다른 회로가 돌아간다. 이때부터 온전히 화선지 한 장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먹을 가는 시간이다. 벼루를 끄집어내어 물이 넘치도록 가득 부었다. 세상이 점점 바뀌고 빨라지면서 먹을 갈아서 쓰던 행위가 이젠 상하지 말라고 아교가 잔뜩 섞인 먹물로 변해 버렸다. 서숙(書塾)에서는 국적이 다른 먹물 통이 테이블 위를 점령했다. 시간이 없다는 요즘 사람들은 도를 닦듯 갈아 대는 먹보다 빨리 선생의 체본(體本) 한 장을 더 받고 싶어 했다.

    먹 가는 행위를 주술처럼 즐긴다. 먹을 갈면서 우주의 중심을 내 축에 맞추어 이동시킨다. 그래서 먹을 갈고 있으면 심장이 차분해진다. 흡족하게 잘 갈린 벼루 속 먹물은 쌀이 가득한 쌀독의 기쁨과 같다. 벼루에 고여있는 먹물을 쳐다보는 즐거움이 드레스 룸을 가득 채운 명품 가방보다 더 여유롭다.

    반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예술가의 기질이지만, 유일하게 반복을 즐기는 작업이 먹을 가는 일이다. 둥글게 일정한 속도로 팔을 돌린다. 어쩌면 감정의 리듬을 맞춰가며 돌리고 있는지 모른다. 멈추려 하지 않는 관성이 붙으면 팔은 습관적으로 돌고, 머릿속은 무아(無我)로 온통 깨끗하게 비워져 버렸다. 갈고닦아 반들반들하게 만드는 연마처럼 생각의 응어리를 갈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보였던 맑은 물이 점점 걸쭉해지더니 제법 먹물로서의 이름값을 하려 한다.

    자가격리 처음 한 이틀 동안은 이렇게 먹만 돌려 댄 것 같다. 복잡한 마음이 온 육신에 가득할 때 묵향은 위로가 되었고, 불길한 생각들을 끊어내는 것이 단순한 반복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아무리 반복이라도 먹을 간다는 것이 어디 단순한 일만 이던가. 그것은 생각을 돌리는 일이다. 운동선수는 뛰기 전에 준비운동을 한다. 요리사는 재료를 준비하면서 만들어질 요리를 상상한다. 검객은 칼을 간다. 서예가는 먹을 갈면서 붓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 낸다. 장편을 집필하려 스스로 쇠창살을 채우던 어느 소설가의 단절을 기억해 냈고, 그래서 천하주유(天下周遊)하며 붓을 멀리했던 서예가의 무거운 어깨를 뒤돌아보았다. 벼루에서 먹을 돌리며 자가격리 중인 서예가를 위로했다.

    “뭐하고 계세요?” “먹 갈고 있습니다.” 이때 알만한 사람들은 서예가가 예민하고, 흥분해 있을 것이며,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 먹을 갈고 있다는 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의식임을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본다. 일상과 단절의 시간 열흘이 당신에게도 주어진다면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디고 있을까…

    윤영미(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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