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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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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펜스룰과 책임주의- 이수경(법무법인 더도움 변호사)

  • 기사입력 : 2021-08-04 20: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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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창 시절에 ‘열 번을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참 싫었다. 굳이 싫다는 여성에게 남성이 끊임없이 치근덕거려도 원래 그런 것이라며 면죄부를 주는 속담 같아서였다. 특히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강간죄에 대한 무죄 판결문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는데, 무죄의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된 피해자가 입었다는 청바지 때문이었다. 청바지는 하체에 꽉 끼는 바지인데, 반항하는 피해자의 청바지를 혼자서 벗겨내기는 어렵다는 것이 무죄의 이유였다.

    알게 모르게 스며든 남녀 불평등 속에서 살아왔고 공부하면서도 그런 불평등에 분노했었는데, 최근 수십년 동안 사회가 급변했음을 체감한다.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어 올해 10월 2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기에 더 이상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미담이나 면죄부로 남을 수 없게 되었고 대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판시한 이래로 어지간한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를 바라보기 어렵게 되었다.

    당연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과연 ‘성범죄’로 ‘형사처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사건들이 보인다. 강간이나 카메라 등으로 피해자를 촬영해서 영상을 외부로 노출시킨 중범죄나 성범죄가 명확한 사건에서 처벌의 필요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도 없겠지만, 경미해 보이는 강제 추행이나 성범죄가 맞나 싶은, 그런 신체 접촉을 두고 강제 추행이라는 사건에서는 범죄로 인정하고 굳이 처벌을 해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경미한 강제 추행으로 낮은 벌금형을 선고받는다고 할지라도 ‘성범죄자’가 되는 것이고 특별법에 따라 가해자는 매해 마다 관할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신상 정보를 등록해야 하고 몇몇 직업은 가질 수도 없기에 당사자가 느끼는 중압감과 부담은 상당하다. 실제로 한 남성은 회사 회식에 참석한 후에 혼자 단란주점에 가서 여성 종업원에게 ‘여기 한 번 앉아보라’며 손목을 잡았다가 강제 추행으로 고소되어 형사 조정에 회부되었는데, 아무런 전과도 없고 대기업에 재직 중인 아주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장이었다. 피해자인 여성 종업원은 조정 자리에 나오지 않아 전화로 통화했는데, 정신적 피해보상이라며 합의금으로 700만원을 요구했었다. 행위에 비해 너무 과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정을 불성립시키려 하였지만, 직장이며 가정이며 잃은 것이 많았던 남성은 군말 없이 그 금액을 지급하고 합의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사전에 여성과 접촉을 차단하겠다며 ‘펜스룰’을 지지하는 남성들이 생겨나고 있다. 펜스룰은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이 2002년 하원의원 시절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는 절대 1대 1로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나는 성범죄의 고의나 의도가 없었지만, 상대방은 성범죄로 받아들였으면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처음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여성과의 접촉의 여지를 없앤다는 것이다. 하지만 펜스룰은 또 다른 남녀 차별이 될 수 있다. 여전히 사회 조직 대부분의 상층부는 남성 위주인 상황에서 일터에서조차 펜스룰이 적용되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된다면 여성의 채용이나 승진의 기회는 줄어들고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더욱 두꺼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형사법에는 책임주의라는 것이 있다. ‘책임이 없으면 형벌도 없다’는 법언에 따라 책임 없으면 범죄 역시 성립하지 않고 범죄 형량도 책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형법 상의 원칙이다. 의사 형성의 비난 가능성에 중점을 둔 것으로 책임의 범위 내로 형벌권을 한정함으로써 국가의 형벌권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 위주로 수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책임의 근거가 되는 성범죄의 고의 유무는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한계가 있어서 사회적인 판단이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수경(법무법인 더도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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