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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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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그 섬에 가고 싶다-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21-08-05 2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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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찍이 사람이란 ‘사이’의 존재임을 가장 함축적이면서 명징하게 노래한 시인은 정현종이었다. 그의 시 〈섬〉은 고작 두 행뿐인데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시에서 ‘섬’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로서의 ‘섬’이다. 이때의 섬은 현대인의 단절된 인간관계의 복원을 염원하는 상징적 기호이기도 하다. ‘그 섬’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관계의 회복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다락방’ 같은 고독한 공간으로서의 ‘섬’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부대끼다보면 인간에 대한 염증이 짙어져서 무인도 같은 ‘섬’을 꿈꾸게 된다. 이런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섬이고, 그 섬은 외로움을 달래고 싶거나 고독해지고 싶어서 찾는 이율배반적인 공간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치유 받는 존재다. 상처받지 않으면 치유 받을 필요도 없겠지만 자극과 반응이 사라진 진공상태 같은 공간을 우리는 더 견딜 수가 없다. 현실 바깥에 ‘섬’이 없다면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섬’이 있는데도 ‘지옥’에 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는 무수한 ‘섬’을 만난다. 극장에 가도 의자와 의자 사이에 섬이 있고, 식당에도, 카페에도, 병원에도, 은행에도, 심지어 화장실 문 앞에도 섬을 그려놓았다. 문제는 이 섬이 실존의 확인이나 상처의 치유를 위한 섬이 아니라 공동체의 ‘무덤’으로서의 섬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남을, 남이 나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에 강제적으로 벌려놓은 ‘격리’로서의 ‘섬’이다. 이 섬은 가서도 안 되고, 갈 수도 없다. 의자나 테이블 하나를 띄우고 건너서 바라보는 풍경은 황량함을 넘어 살풍경하다.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로 이어지고, 심리적 거리는 정서적 거리로 이어진다. 코로나19가 두렵고 악랄한 건 고통과 죽음 때문만이 아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존재들을 가장 위험한 존재들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체온을 가지고 숨 쉰다는 이유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벼랑으로 내몰린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공동묘지 빼고는 다 거리두기를 한다’는 우스갯소리에 우리는 웃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정녕 희망은 없는가?

    신영복 선생은 그의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여름징역살이’에 대해 쓴 부분이 있다. 여름감방은 지옥이었단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이로만” 느끼게 했고, 오로지 체온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옆 사람을 미워해야 했단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절망적이었단다. 그러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증오는 서서히 사라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되었단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지금 칼잠 자는 뜨겁고 괴로운 ‘여름감방’의 죄수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웃을 회복하고 서로의 체온으로 원시적인 우정을 되찾는 날이 올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섬이 간절한 때가 지금이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라는 안개에 묻혀 그 섬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신념이라면, 신념의 다른 말이 곧 희망일 것이다.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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