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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⑭ 대구에서 제일모직 설립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⑭ 대구에서 제일모직 설립
1954년 제일모직 설립… 40년간 대구 경제 중심으로

  • 기사입력 : 2021-10-01 08: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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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설립 후 한국 사회에서 이병철에게는 거부, 한국 최초의 재벌, 한국 제일의 기업가 등 여러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돈이 많음을 비유하여 ‘돈병철’이라는 애칭도 생겨났다.

    돈을 많이 지출하면 “네가 돈병철이냐? 이렇게 많은 돈을 사용하게”하거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분들도 하루 일을 끝내고 따뜻한 한끼 식사나 막걸리 한잔 마신 후에는 “돈 많은 이병철도 부럽지 않다”는 등 돈 이야기에는 늘 이병철 이름이 따라붙었다.

    이러한 표현은 듣는 분의 입장에 따라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필자는 결코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볼 때 이병철을 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서민들도 “너도 노력해봐라, 돈 많이 벌어라”, “나도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등 긍정의 의미와 자기 격려를 위한 자문자답, 자기위로라고 생각한다.

    1955년 완공 후 1995년 구미로 이전하기까지 제일모직은 40년간 대구 경제의 중심이었다./제일모직/
    1955년 완공 후 1995년 구미로 이전하기까지 제일모직은 40년간 대구 경제의 중심이었다./제일모직/
    제일모직 구미 이전 후 대구 공장 터는 대구삼성창조캠퍼스와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대구오페라하우스 등으로 새롭게 변화되었다./대구시청/
    제일모직 구미 이전 후 대구 공장 터는 대구삼성창조캠퍼스와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대구오페라하우스 등으로 새롭게 변화되었다./대구시청/

    인터넷은 고사하고 신문 보급도 원활하지 않던 시기에 ‘돈병철’이라는 별칭이 전국적으로 유행어가 되었으니 그만큼 이병철의 존재는 높았다.

    이병철은 회고록에서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어느 한가지를 성공시키고 또 다음 사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현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나가면 더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진다”고 하였다.

    제일제당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자 이병철은 또 다시 다음 사업을 구상하였다.

    이번 구상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들의 실생활에 무엇이 필요한지 폭넓게 한국경제의 현장을 조사, 분석하면서 사업대상을 찾았다.

    인간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필수요건 3가지는 의, 식, 주이다. 즉, 먹는 것과 입는 것이다. 제일제당이 먹는 사업이었으니 이제 입는 사업에 관심을 가져보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국의 경제는 한발 한발 일어서 나아갔다. 광목, 밀가루, 설탕 등의 생필품은 비교적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면방직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어느 정도 기술력이 축적돼 있었지만 모방직은 면방직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이 전무한 상태였다.

    북구 침산동에 7만여평 공장부지 확보
    값 싸고 질 좋은 옷감 ‘골덴텍스’ 생산
    이승만 대통령 휘호로 감사 표시하기도
    1961년 직원 1400명으로 단일공장 최대
    기업문화 선도 ‘삼성 사관학교’로 불려

    # 대구에 설립한 제일모직 공장

    이병철은 값싸고 질 좋은 옷감을 생산하여 국민 모두가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모방직에 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1954년 9월, 대구 북구 침산동에 7만여평 공장부지를 확보한 후 ‘제일모직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공장은 설립 당시 도시 외곽이었지만 도시 팽창으로 환경이 좋지 않아 오페라하우스, 삼성상회 복원건물 등 복합시설이 있는 ‘삼성창조경제단지’로 탈바꿈되었다.

    1956년 5월,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골든텍스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날이다.

    영국산 복지 수입품 한 벌 값이 봉급생활자 3개월분 급료와 맞먹는 6만환이었는데 제일모직은 1/5 수준인 1만2000환임에도 국산품에 대한 불신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위기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절묘한 해법을 찾는 이병철은 기술진을 독려하고 품질향상에 주력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정부의 수입품 규제와 국산품 애용 정책 등으로 판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57년 10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모직 공장을 방문하였다. 제일모직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이 좋은 국산 양복을 입게 되었다고 감사함을 표시하고 ‘의피창생’(依被蒼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듦)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1965년 동아일보 제일모직 골덴텍스 광고./이래호/
    1965년 동아일보 제일모직 골덴텍스 광고./이래호/

    # 제일모직 브랜드 골드와 장미

    제품이 출시된 후 소비자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상품 작명을 하였는데, 일본인 하야시 고문이 모든 제품에 ‘골드(GOLD)’를 붙이자 하였다. 그렇게 하여 골든텍스 VIP, 골덴텍스 프레지던트 등 당시 최고급을 의미하는 ‘GOLDEN TAX’ 시리즈가 탄생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장미이다. 제일모직 생산제품 직매장을 개설하기 위해 1958년에 설립한 회사가 ‘주식회사 장미라사’이다. 제일모직 사화도 장미이다. 수편모사 브랜드 이름도 장미(ROSE)라 붙였다. 1961년 2월에 결성된 친목 단체도 ‘장미상조회’이다.

    제일모직은 1957년 12월, 최초로 공개채용을 거쳐 1961년 단일공장의 직원수가 1400여명으로, 남한 제일의 회사로 성장하였다.

    제일모직이 생산한 골덴텍스의 거리 광고물.
    제일모직이 생산한 골덴텍스의 거리 광고물.

    # 삼성 비서실 탄생

    1958년 삼척시멘트, 안국화재, 상업은행 인수와 1959년 조흥은행 등 몇개의 회사를 인수 및 설립한 후 조직구성의 개편을 통해 ‘비서실’을 두었다. ‘비서실’은 삼성이 창업한 회사와 인수한 회사를 총괄 관리하였다.

    권경자 박사의 저서 ‘유학’에 나오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관한 내용이다. “삼성비서실은 삼성물산 내에 있는 ‘○○과’ 조직 중 하나로 1959년 5월 1일 20여명의 인원으로 출발하였다. 1998년에는 구조조정본부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06년에는 전략기획실로 바뀌었다. 주요 기능은 인사, 기획, 감사, 재무, 홍보 등이다. 2008년 4월 22일 이건희 회장이 전략기획실 경영 쇄신안을 발표함으로써 지난 50년간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던 삼성의 비서실은 기록 속으로 사라졌다.” 제일모직은 1962년 회사의 규모에 맞게 회장체제로 개편하였다. 이때부터 삼성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체제로 기반을 다져나갔다.

    # 제일모직, 삼성의 사관학교

    제일모직 창립 초기 독일로 기술 연수를 갔던 조필제(이병철의 형 이병각의 사위) 전 동서커피 사장의 회고록이다.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일반 기업과 달리 삼성의 사관학교라 부른다. 관리능력, 조직능력 등 삼성맨 양성 기업문화를 선도하는 회사였다. 제일모직 직원이 다른 계열사로 전출하여 제일모직의 우수한 관리능력시스템을 전파하여 오늘날 삼성을 만든 원동력”이라 하였다.

    그리고 “1966년부터 제일모직에는 사원과 공원으로 구분하던 호칭이 없어졌다. 현장 생산직원도 공원 대신 모두 사원으로 불렸다. 이병철은 직원의 복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면서 20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할 수 있는 최신시설의 기숙사도 지었다. 공장시설과 환경이 너무 좋아 ‘제일대학 캠퍼스’라 불릴 정도였다.”

    # 제일모직 월급날은 논밭 사는 날

    당시 대구의 제일모직 여직원은 함안, 의령, 창녕 출신들이 많았다. 회사가 건실하여 월급도 많았다. 딸들이 월급을 받아 고향 부모님에게 보내면 꼬박꼬박 저축하여 주변에 땅을 사는 바람에 다른 지역보다 농토가격이 비쌌다고 한다.

    제일모직에 합격자가 나오면 동네 입구에 ‘누구 누구집 둘째 딸 제일모직 합격’이라는 축하 현수막을 붙일 정도였다. 그 당시 제일모직 입사 경쟁률이 평균 50:1 정도였다. 1959년은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될 때 였는데, 제일모직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경찰도 잡지 않았다고 한다.

    <이병철의 한마디> 불안을 안고 사업을 시작하지 마라. 출발부터 의심하고 망설이면 될 일도 안되는 법이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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