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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3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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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부마민주항쟁 42주년 참가자들 ‘그날의 기억’ (상) 마산 거리로 나선 평범한 시민들

평범한 시민들… 남은 건 상처뿐
“유신철폐” 시민들 외침은 상처만 남겼다

  • 기사입력 : 2021-10-14 21: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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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재타도-유신철폐-목이 터지라 외치며/마산의 중심에서 함께한 민초와 함께/시월에 피었던 가장 붉고 뜨거웠던 꽃이여/꽃송이 꽃송이 활화산처럼 터졌던.’(부마민주항쟁기념사화집 ‘부마인가요?’, 정일근 시 ‘시월, 처음’ 일부)

    1979년 10월 유신체제의 종식을 이끌어 낸 부마민주항쟁의 주역은 민초였던 ‘평범한 시민들’이다. 하지만 항쟁은 이들에게 후유증·트라우마와 함께 ‘시위 참가자’란 낙인을 남겼고 더 나아가 그들의 오랜 꿈을 빼앗아갔다. 42년이 지난 2021년, 항쟁의 현장이었던 마산에는 여전히 항쟁 참가자들이 살고 있다. 누구보다 평범했지만,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으로 말이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창원공단 한국캬브레타 노동자 박영주(62·당시 20세)씨, 불종거리 입구서 간판업을 하던 자영업자 양석우(69·당시 27세)씨, 경남 태권도 대표였던 경상고등학교 학생 이창곤(60·당시 18세)씨는 직업과 나이는 모두 다르지만 마산의 중심지 창동거리에 피어난 붉고 뜨거웠던 꽃들이었다. 부마민주항쟁 42주년을 맞아 세명의 회고를 통해 항쟁 참가자들이 지금까지 겪어 온 삶을 느껴본다.

    42년 전 박영주·양석우·이창곤씨
    창동·오동동 일대 시위 참가했다
    폭행 등 신체·정신적 고문으로
    이후 일상생활 속 트라우마 겪어
    친구 밀고 사실에 평생 죄책감도
    트라우마센터 개소 등 지원 필요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2년 전 육군고등군법회의 자료에서 찾아 공개한 부마항쟁 사진. 1979년 10월 18일 경남대에서 사복경찰관이 시위학생들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2년 전 육군고등군법회의 자료에서 찾아 공개한 부마항쟁 사진. 1979년 10월 18일 경남대에서 사복경찰관이 시위학생들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다.

    ◇1979년 10월 창동, 그곳에 모두 있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항쟁에 참여한 이는 박영주씨. 항쟁 당일인 18일 직장을 쉬었던 박씨는 오후 2시께 경남대 정문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하기 위해 오후 5시 3·15탑에서 만나자”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3·15탑에 집결한 시위대의 첫 목표는 창동에 있는 남성파출소. 오후 6시께 박씨는 시위대를 따라 남성파출소에 돌을 던지며 항쟁했고, 이때 경찰은 처음으로 최루탄을 발사하며 대응했다.

    양석우씨가 창동에 도착한 시기도 이 무렵이다. 이날 예비군 훈련을 받고 유리창이 깨진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양씨는 시위 소식을 듣고 홀로 창동 정류장에 내렸다. 경찰의 진압에 흩어진 소수 시위대에 합류한 양씨는 북마산파출소로 향했다. 시위대는 북마산파출소에 불을 지른 후 산호파출소와 양덕파출소를 거쳐 오후 8시께 공화당사가 있는 용마맨션에 도착했다.

    같은 시간 양석우씨와 달리 창동에서 오동동으로 향했던 박영주씨도 용마맨션 앞에 도착했다. 우연히 한곳에 모인 시위대는 건물 2층에 있는 공화당사를 향해 돌을 던지고, 현판을 불태우며 유신철폐를 주장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경찰서 산호파출소 피습 현장./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경찰서 산호파출소 피습 현장./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학생이었던 이창곤씨는 18일 시위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 날인 19일 등교하니 친구들로부터 전날의 상황을 듣게 됐다. 학교는 오전 수업 후 학생들을 귀가시켰고 이씨와 친구들은 오후 2시부터 성호동의 자취방을 거점으로 삼고 함께 창동·오동동·북마산 일대 시위에 참여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창원공단 한국캬브레타 노동자였던 박영주(62·당시 20세)씨.
    부마민주항쟁 당시 창원공단 한국캬브레타 노동자였던 박영주(62·당시 20세)씨.
    부마민주항쟁 당시 자영업자였던 양석우(69·당시 27세)씨
    부마민주항쟁 당시 자영업자였던 양석우(69·당시 27세)씨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상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이창곤(60·당시 18세)씨.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상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이창곤(60·당시 18세)씨.

    ◇잡히면 가혹한 고문… 후유증·트라우마 호소= 박영주씨는 19일 퇴근 후 재차 오동동 일대 시위에 참여했다.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경찰에게 붙잡힌 박씨. 다행히 3~4m 끌려가던 중 주변 시위대에 의해 구출돼 기사회생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목이 밟히면서 수개월간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양석우씨는 붙잡힌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19일 밤 마산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경찰에 포위돼 검거됐다. 유치장에서는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취조 과정에서 경찰은 주리를 틀고, 얼굴에 담요를 감싼 후 뒹굴게 하는 등 고문을 하며 유도신문을 했다. 10·26사태 다음 날인 27일 석방됐지만, 고문의 영향으로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한 달간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이창곤씨는 19일 밤 창동 일대에서 시위를 끝내고 성호동 친구의 자취방에 머물던 중 갑작스럽게 형사가 들이닥치자 친구 1명과 함께 쪽방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 도망쳤다. 추격전은 발을 내디딘 지붕 한곳이 무너지면서 끝나게 됐다. 이씨는 체포 당시 경찰들에게 10여 분가량 집단 폭행을 당했으며, 취조 과정에서도 신체·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결국 함께 있던 친구 3명의 주소를 말하게 되며 친구 5명 모두 잡히게 됐다. 이들은 사실과 다른 14개의 혐의를 뒤집어쓰며 8일간 조사를 받았고, 이후 즉결심판을 받아 추가로 7일 동안 구류하게 됐다.

    이씨는 무차별적인 고문으로 인해 관절 곳곳이 좋지 못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고 있다. 특히, 고문에 못 이겨 친구 3명을 밀고한 행위는 여전히 가슴 속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당시 경찰에게 친구의 집을 안내하며 걷던 성호동 철둑길이 영원히 끝나질 않길 바랐다. 석방 이후에는 죄책감에 친구들을 피해 다녔다. 훗날 친구 1명이 일찍이 작고하자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어두웠던 그날의 기억 때문일까, 이창곤씨는 42년이 지난 지금도 불을 켠 채로 잠자리에 들지만 깊게 잠들지 못한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전화벨 소리. 다시 잡혀갈 것 같다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져 온몸이 경직된다고 한다.

    ◇후유증·트라우마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지원 필요= 신체적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는 항쟁 참가자들 대다수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피해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발간한 ‘부마민주항쟁 증언집2·3-마산 편’에도 항쟁 참가자들 수십명의 사례가 담겨있다. 김효영(56·당시 14세)씨는 대인기피증과 분노조절 장애를 평생 짊어지고 살고 있으며, 김경훈(58·당시 16세)씨는 경찰이 휘두른 진압봉에 왼쪽 어깨가 부러졌고 이후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의 짐이 됐다.

    관련 단체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설진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은 “항쟁 참가자들은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다르게 당시 일을 떠올리거나 박정희, 유신정권 등 단어를 보면 순간적으로 화가 나는 분노조절 장애식의 잠재된 트라우마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며 “부마항쟁을 비롯해 3·15의거, 6월항쟁이 있었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트라우마 센터 설립에 대해 요구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검토조차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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