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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부마민주항쟁 42주년 참가자들 ‘그날의 기억’ (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세월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치유는 꾸준한 명예회복

  • 기사입력 : 2021-10-17 20: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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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마민주항쟁은 10·26사태로 이어지면서 유신 독제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됐다. 시민들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작을 기대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계엄령은 유지됐고 12·12 군사 반란 등을 거쳐 전두환이 정권을 집권하며 또 다른 독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은 ‘부마사건’으로 치부됐다. 항쟁 참가자들의 위대한 행동은 왜곡되고 잊혀 갔다.

    고문 인한 트라우마로 ‘꿈’ 포기
    독재정권의 반복은 인생 바꿔놔
    수십년 민주주의 발전 힘썼지만
    자료 없어 민주항쟁 인정 못받아
    7년간 446명 신청해 309명만 인정
    진상규명위 활동 기간 연장돼야

    시민들이 지난 1979년 10월 집회 등을 금지하는 계엄령 포고문를 읽고 있다.
    시민들이 지난 1979년 10월 집회 등을 금지하는 계엄령 포고문를 읽고 있다.

    ◇직장·꿈 포기해야만 했던 가혹한 현실= “태권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죠…” 1979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이창곤씨는 경남 대표 태권도 선수였다. 중학교 시절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등 실력도 출중했다. 항쟁을 경험하자 태권도 도복을 다시 입을 수 없었다.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기만의 공간에서 벗어나면 불안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평범한 사회생활조차 할 수 없었다. 몇 년간 정처 없이 방황하던 그는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에 경남대 앞에 분식점을 열 수 있었다. 이후 30여년간 업종은 조금씩 바뀌었고 현재는 경남대 인근 주택가에서 자신만의 성 같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캬브레타 노동자였던 박영주씨는 당시 벌이가 꽤 괜찮았다. 항쟁 당시 체포되지 않아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항쟁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독재정권이 반복되는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커져만 갔다. 결국 그는 1980년 사표를 내고 공부를 시작해 이듬해 경남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경남지역 학생운동을 이끌어갔다. 1983년 전두환을 타도해야 된다는 내용이 담긴 ‘3·15 시민봉기 제23주년 기념 성명서’를 작성해 유포한 혐의로 구속됐다. 3·15의거 관련 최초의 구속자였다. 1985년에는 부마민주항쟁 전개 과정을 지역 무크지(부정기간행물) ‘마산문화’에 실었다. 현재 업으로 삼고 있는 지역 사학자로의 첫걸음이었다.

    박씨는 현재 경남대 박물관 비상임연구원으로 지역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며 생활은 궁핍해졌을지도 모르지만 민주주의가 없는 삶을 살 수 없게 됐다. 자유로움을 되찾기 위한 행동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인생과 맞바꾼 민주주의… 명예 회복은 증거 없어서 기각= 항쟁 당시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받은 양석우씨는 변화하지 않는 세상을 보며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됐다. 이러한 의식은 1986년까지 이어간 간판업 장사와는 별개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마산창원민주청년회 활동을 하며 마산자유수출지역 여성노동자 파업 등 지역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양씨는 이후에도 노동계에서 계속 활동하며 노동 관련 인사로 마산지역 정치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은퇴 이후 마산합포구청 공공근로 근무자로 활동해오던 양씨는 코로나19 사태로 최근 2년간은 일을 쉬고 있는 상황이다.

    양씨가 남은 일생 이루고 싶은 목표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받는 일이다. 그는 지난 2014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출범하자마자 관련자 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 이후 자료를 보완해 두 차례 더 신청서를 보냈지만 모두 받아 들어지지 않았다. 항쟁 당시 고문·구타를 당한 후 40여년간 응어리졌던 고통이 해소되지 못한 것이다.

    그는 1979년 10월 27일 석방을 위해 부모님과 연락하고자 전화했었던 옆집 아들의 인우보증이 있으면 관련자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주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309번지, 양씨가 찾는 사람의 성함은 주상식(62세 추정)씨다. 양씨는 “이름과 주소까지 아는데도 진상규명위는 단지 관련자 신청에 대한 기각 결정만 내렸다. 1명이라도 더 인정받을 수 있도록 세심히 조사하는 게 항쟁 참가자들의 명예회복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지금도 주씨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있지만 나이도 있고 해서 쉽지 않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 마산시내에 출동한 계엄군 모습./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979년 10월 마산시내에 출동한 계엄군 모습./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끝나선 안 되는 명예회복… 진상조사위 연장 절실= 설진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은 “양씨처럼 증거 및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서 관련자 인정이 기각된 참가자들이 많다. 최근에는 몸이 굉장히 불편한 어르신이 찾아와 항쟁 관련자 인정 절차가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명예회복 절차가 지속돼야 한다고 느끼는 점이다”고 말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피해사실이 확인된 자들 중 30%만 관련자 신청을 하고, 이들 중 60%만 인정받은’ 진상규명위 관련자 현황에서도 절실히 드러난다.

    계엄사에 기록된 부마민주항쟁 관련 구속·즉결심판을 받은 연행자는 총 1563명. 하지만 지난 2014년부터 총 446명(501건)이 진상규명위에 관련자 신청을 했고 마산 159명, 부산 148명, 기타지역(광주·제주) 2명 등 총 309명이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양씨처럼 진상규명위에서 관련자 인정이 최종 기각된 자는 마산 6명, 부산 13명 등 총 19명(36건). 주된 기각 이유는 연행된 후 훈방돼 기록이 없거나, 의료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다. 이외 신청자는 현재 조사 중(134건)에 있다.

    진상규명위는 지난 6월 진상규명 활동기간이 만료됐다. 관련자 신청은 계속되겠지만, 정상적인 진상규명 없이는 이들을 관련자로 인정하기는 한계가 있다.

    이와 관련 진상규명위는 유치준 사망사건, 계엄사 언론사 통제 등 5개 보완과제와 사제총기 사건 진상조사 등 7개 신규과제에 대한 진상규명이 진행돼야 한다며 3년의 활동기간 연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차성환 진상규명위 상임위원은 “그동안 조사해오던 것도 미흡하게 남아 있고 새로운 자료도 많이 발굴된 상황에서 이를 분석해서 조사해야 하지만 활동기간 만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연장이 반드시 이뤄져 항쟁 참가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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