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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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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⑤ 어릴 때부터 싹튼 민족의식

고향서 만세운동 겪은 소년, 서울서 6·10만세운동 앞장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 기사입력 : 2021-12-03 08: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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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을 중요시하고 유림 학문의 깊이가 있는 조홍제의 조부도 시대의 흐름에는 역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손자 조홍제의 신학문에 대한 열의를 막지 못하고 조부도 마침내 허락을 해 조홍제는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조부는 신학문을 허용하면서 서울로 유학 가는 조홍제에게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첫째, 신학문을 하면서도 한학 공부는 계속하거라. 둘째, 잡기를 가까이 하지 말거라. 셋째, 여색은 어떠한 이유로도 근접해서는 안된다. 넷째, 졸업 후에는 반드시 귀향하여 장남으로 집안의 일을 하거라.

    꿈이 현실이 되어 서울로 유학 갔지만 시골에서 한학 공부만 한 조홍제는 신학문의 기본 지식이 없이는 신식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군북 3·20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0일 함안 군북에서 일제에 저항하여 일어났다. 사진은 99주년 기념행사의 한 장면./함안군청 /
    ‘군북 3·20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0일 함안 군북에서 일제에 저항하여 일어났다. 사진은 99주년 기념행사의 한 장면./함안군청 /

    # 17세에 보통학교 과정 1학년 공부

    나이가 17세인데도 불구하고 1922년 보통학교 1, 2, 3학년 과정을 가르치는 중동학교 초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6개월 만에 수료를 하고 다시 서울의 협성실업학교에 들어가서 1년 만에 4, 5, 6학년 과정을 마쳤다.

    당시 협성실업학교는 보통학교 인가가 되지 않아 전 과정을 배웠음에도 고등보통학교 입학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고등보통학교는 학력과 상관없이 입학시험을 보아 성적이 우수하면 입학이 가능한 제도가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조홍제는 1924년 19세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지원, 우수한 입학성적으로 합격을 한다.

    이때 진주 지수면 출신 구인회도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조홍제와 함께 다녔다. 당시 교장은 인촌 김성수로 조홍제의 처남 하영진과 막역한 사이였다.

    조부 허락얻어 열일곱살에 서울로 유학
    보통학교 6년 과정 1년6개월 만에 마친 후
    1924년 열아홉에 구인회와 중앙고보 입학
    수학잘하고 성적좋아…응원단장 맡기도

    종조부 서천의 독립정신 피 이어받아
    3학년 때 6 10만세운동 주모해 고문 수감
    동맹휴학 주도자로 오인돼 결국 퇴학

    # 구인회와 중앙고등보통학교 함께 입학

    조홍제는 입학성적도 우수하였고, 나이도 동기생보다 많아서 반에 급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는 5년제였다. 조홍제는 입학부터 4학년 2학기 퇴학당하기까지 4년이 자신의 젊음을 활짝 피웠던 시기라고 회고하였다.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새로운 지식에 갈망하던 조홍제는 학교 수업 외에도 여러 가지 책도 탐독하였다. 춘원 이광수의 문학책을 읽기도 하였지만 조홍제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은 책은 과학과 경제, 수학 등이었다.

    # 수학 천재, 응원단장 조홍제

    학업성적도 우수하여 반에서 1, 2등을 빼앗기지 않았다. 특히 교내에서 조홍제만큼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없었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는 조홍제의 손만 가면 해답이 나왔다. 수학 교사도 조홍제를 의식할 정도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는 학교 스포츠로 축구부는 물론 지금도 쉽지 않은 조정부를 두어 운영할 정도로 선도적 학교였다. 학교 간 운동 시합이 있는 날이면 선배나 동료 급우들이 조홍제를 찾았다. 구수한 사투리에 제법 입담도 있고, 성적도 우수한 만능 재주를 가졌기에 선배들은 조홍제에게 단체 응원을 리더하는 응원단장을 맡겼다.

    조홍제는 삼베 몽당 바지에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매고 응원단장이 되어 학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학창시절이 아니면 부릴 수 없는 객기라고는 하나 조홍제는 회고록에서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다고 하였다.


    # 6·10 만세 운동 참여, 수감생활

    1919년 3월 20일, 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14살의 조홍제는 군북 읍내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군북 장날 유림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주민 등 5000여명이 일제에 항거한 ‘군북 3·20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7년 후,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조홍제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중앙고등보통학교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6·10 만세 운동에 조홍제는 주모자 가운데 1명으로 몰려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겪었다. 이 운동의 주모자를 찾기 위한 경찰의 방망이 구타와 코에 물붓기 등 심한 고문에 조홍제는 기절까지 하였다. 오직 모른다는 대답을 일관되게 하자 결국 서대문 형무소로 넘겨져 수감생활로 이어졌다. 학교의 노력 등으로 기소유예가 되어 출소하였지만 모진 고문의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6·10 만세 운동’과 관련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9일자 기사(위)와 한글본./이래호/
    ‘6·10 만세 운동’과 관련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9일자 기사(위)와 한글본./이래호/

    # 퇴학당한 아픔을

    학교로 다시 돌아온 조홍제는 또 한번 의도하지 않게 동맹휴학의 주도자로 오인되어 결국은 16명의 주동 학생과 함께 퇴학 조치를 받았다. 조홍제는 퇴학까지 당한 이 쓰라린 실패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인생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기복이 있으며 불행한 일도 때로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홍제는 이러한 일을 겪고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세번, 네번 숙고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조홍제는 “중퇴생, 낙제생이 되면 그것을 충격으로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으니 그렇게 위축할 필요는 없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조홍제와 구인회가 다녔던 현재의 서울 중앙고 전경, 뒤편 붉은색 벽돌 건물은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조홍제와 구인회가 다녔던 현재의 서울 중앙고 전경, 뒤편 붉은색 벽돌 건물은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 조홍제의 투철한 독립정신

    조홍제의 반일 의식은 종조부 서천의 일본 침략에 대응한 독립정신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다. 군북에서 1919년 3·20 독립 만세 운동을 직접 겪었고, 서울에서 6·10 만세 운동 때는 감옥까지 갔다. 조홍제의 일제에 대한 저항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유학을 갔다 온 후에도 있었다. 지식인이자 마을의 지도자였던 조홍제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일본 경찰은 조홍제가 일본에서 대학까지 공부한 탓에 일본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하여 조홍제를 통해 마을 통치를 하려고 군북지역에 권한과 책임있는 자리를 추천하였다. 하지만 조홍제는 일본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할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하였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마을 사람들을 관리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투철한 민족정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조홍제의 이야기다. 효성그룹 2대 회장인 장남 조석래는 1935년생이다. 10살 때 해방이 되자 아버지 조홍제는 아들 조석래에게 가장 먼저 애국가를 가르쳤다.

    중앙고 교내에 있는 6·10 만세 운동 기념비./조홍제회고록/
    중앙고 교내에 있는 6·10 만세 운동 기념비./조홍제회고록/

    # 중앙고등보통학교

    현재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이다. 인촌 김성수가 1915년 4월 이 학교를 인수하고 1917년 3월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1년 4월 1일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약칭 중앙고보)로 개칭되었다. 조홍제는 4학년 때 퇴학을 당하였지만 훗날 18회 졸업생으로 인정되었고, 1991년 제4회 자랑스러운 중앙인 수상자가 되었다.

    <조홍제의 한마디> 타인을 멸시하지 말라, 근검과 성실을 위주로 하라.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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