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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잊지 말자 진주만- 차상호 (창원자치사회부 부장대우)

  • 기사입력 : 2021-12-07 21: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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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12월 7일 일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 300여대가 하와이 오아후섬 미군 기지를 폭격했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선전포고도 없었다. 이날은 미국인들에게 치욕의 날이었으며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 됐다.

    태평양 전쟁의 전역은 하와이와 미드웨이 등 중부 태평양은 물론이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등 남서 태평양, 알래스카와 이어지는 알류샨 열도의 북태평양까지 광활하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등은 물론 버마(미얀마)와 인도까지 전화에 휩싸였다.

    지금이야 ‘천조국’으로 불리는 미국이지만,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해군력은 일본이 미국을 앞섰다. 항공모함 역시 일본이 더 많았다. 거함거포주의의 끝자락이기도 했지만, 항모를 활용한 기동전술과 합동 전술의 무대가 된 곳이 태평양 전쟁이다. 나중에 ‘해군 갑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은 진주만을 기습한 후 승리에 취해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에서 미군의 원유저장고와 선박 수리시설 등을 파괴하지 않은 것과 항공모함을 파괴하지 못한 점은 이듬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군 대패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진주만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작전은 ‘기습’이 기본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 해독에 성공하면서 기습은커녕 역습을 당했다. 단 하루 만에 진주만 공습의 주력이었던 항공모함 4척을 잃은 것이다.

    미드웨이 직후에도 일본군은 건재했지만 과달카날 전투 이후부터 기류가 변했다. 이후 여러 곳에서의 전투로 미 해병대가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도 했지만 카트휠 작전을 통해 미군은 부겐빌, 트럭섬 등 일본군 거점을 차례차례 격파했다. 미군은 1944년 필리핀 탈환전을 통해 개전 이후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군의 0식 함상 전투기, 이른바 제로센을 철저히 파괴하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을 벌였다. 일본에 남아있던 항공전력을 사실상 궤멸시켰고, 필리핀 탈환전 과정에서 일본은 루손섬 전투에서만 어마어마한 전사자를 냈다.

    필리핀까지 미군이 차지하면서 일본의 남방자원 수송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부임하면서 일본 본토 공습이 격화됐다. 이전까지의 고공 선별 폭격 기조를 무차별 폭격으로 전환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미국은 도쿄대공습을 넘어 원자폭탄 카드까지 꺼내 들게 됐다.

    다시 과달카날로 돌아가 보자.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섬에 상륙했을 당시 큰 저항이 없었다. 비행장을 짓기 위해 투입된 공사 인력이 대부분이었고 수비병력은 적었다. 포로로 잡힌 이들 중 조선인이 있었다. 비행장 건설 노동자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남서 태평양 혹은 남방지대라고 불리는 전투지역마다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고 희생도 컸다.

    일본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1억 총옥쇄의 1억 인구에는 대만과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자국민들의 목숨까지 하찮게 여겼던 일본 제국주의에 있어 조선인의 목숨은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과 미국에게 진주만 공습이 각기 다른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 역시 기억해야만 한다. 일본이 어떻게 흥했고 조선을 침략했으며 또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되새기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차상호 (창원자치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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