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⑦ 함안으로 돌아온 선비 지식인 조홍제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고향 돌아온 엘리트 지식인, 미래 내다봤지만 ‘사업 꿈’ 못 펼쳐

  • 기사입력 : 2021-12-17 08:04:21
  •   
  • 1935년 일본 호세이대학 졸업한 직후

    비료공장 대리점 등 사업 대상 찾던 중

    고향 함안서 ‘장손 위독하다’ 연락에 귀국

    지극한 간호에도 장남 잃는 슬픔 겪어

    고향에 머무는 동안 인근 도시 다니며

    미쓰이물산 서부지역대리점 개설 협의

    부친에 허락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연로한 아버지 놔두고 고향 떠날 수 없어

    미래경제 예측했지만 사업 구상 중단


    조홍제의 한마디-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하면 뜻밖에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조홍제는 1950~1970년대 당시 기업인 중에 최고의 학력을 자랑하는 엘리트 선비이자 기업인이었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지금의 고등과정을 공부하였고, 일본 유학까지 가서 정규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지식인 중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조홍제가 교수가 되려고 하였던 것도, 서울에서 기업인이 되고 싶었던 것도 모두 집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유림 집안 장손인 조홍제의 입장에서 쉽지 않았다.

    1935년, 일본 호세이(법정)대학을 졸업한 직후 조홍제가 일본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조사한 사업은 비료사업이었다. 일본은 1927년 우리나라 흥남에 연간 10만t 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춘 ‘흥남질소비료공장’을 설립하였다.

    조홍제는 흥남질소비료공장의 한국 대리점을 개설하려는 계획을 가졌다.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이미 한국에 세 곳의 대리점이 있어 추가 개설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두 번째로 조사한 사업도 역시 비료사업 대리점 개설이었다. 조홍제는 비료생산업체인 ‘만주화학’을 경영하는 동경 본사에 찾아가 한국에서 비료사업 대리점을 하겠다고 계획서를 제출하였지만 끝내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 고향 함안으로 돌아온 조홍제

    졸업 후 일본 현장에서 사업 대상을 찾고 있을 때 고향 함안에서 장손이 급성폐렴에 걸려 위독하니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한국의 의료기술은 낙후된 상태였고, 특히 군 단위의 시골은 더 더욱 의료의 혜택은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마산(지금의 창원)에서 의사를 모셔오고 극진한 간호에도 장남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조홍제는 회고록에서 “이때 장남의 일로 귀국하여 해방까지 청춘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좁은 함안 군북에서의 생활이 무척 아쉬웠다. 아울러 대학 졸업 후 일본의 공업도시와 지방의 공업도시, 농촌을 두루 살펴보았다면 내 인생의 과정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조홍제는 고향에 있는 동안 사업 대상을 찾아보기 위해 마산, 부산, 진주 등 인근 도시를 다녔다. 그러던 중 부산에 종합 무역회사인 일본 미쓰이(삼정)물산이 경남대리점을 개설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처가댁이 있는 진주를 비롯 경남 서부지역은 아직 미개척지였다. 조홍제가 관심을 가지고 부산지점장을 만나 서부지역 대리점 개설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미쓰이와 협의가 잘 되어 부푼 꿈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친에게 허락을 요청하였지만 단호히 “절대 안 된다”는 한마디로 거절당하였다.


    # 장남은 장사하면 안 된다

    주식회사 설립, 대리점 경영 등은 그 시기 신사업이었다. 부친이 친구의 권유로 주식을 샀다가 도산하여 손해를 본 과정을 뒤늦게 조홍제가 알았다. 경영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전문 지식도 없이 “일본인이 하는 회사가 잘 되니까 회사 세우면 잘 될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부친이 몇 번의 피해를 본 것이다.

    그러나 부친이 허락하지 않는 더 큰 원인은 장손인 조홍제가 집안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조홍제 역시 부모의 슬하를 떠나 13년의 객지 생활을 하였고, 어느새 부친은 원로하여 건강까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미쓰이물산 대리점을 함안 군북에 개장하기에는 도시가 너무 작았다. 결국 마산이나 진주에 세워야 한다. 그러면 또 아버님을 모시지 못할 형편이고, 도저히 고향을 떠나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조홍제의 첫 사업 구상은 이런 이유로 한동안 중단되었다.

    # 미래경제를 예측한 조홍제

    조홍제와 구인회, 이병철 세 사람의 창업 과정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경제에 관한 직감과 미래 예측 능력에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다. 세 사람의 초기 경제활동을 정리해 보았다.

    이병철은 마산에서 정미소 사업을 한 후 대구에서, 구인회는 진주에서 포목점 사업을 한 후 부산에서 각각 무역업을 하였다. 두 사람은 운송사업도 하였다. 구인회가 생선과 과일 판매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던 시기도 있다. 이병철 역시 밀가루와 국수, 사이다, 정종 등을 생산, 판매를 한 적이 있다.

    조홍제도 귀국 후 초기 함안에서 미곡 도정 작업 사업이나 마산에서 철가공 사업의 경험도 가지고 있다. 구인회와 조홍제의 사업 공통점을 찾아보면 첫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은 고향에서 각각 ‘협동조합’ 관련 일을 해 본 일이다. 세 사람 중 이병철 창업주가 가장 먼저 큰 규모의 경제를 하였다고 평가된다.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설립 후 한국 농촌의 필요 사업인 ‘한국비료’를 설립하여 대한민국 농촌을 변화시켰다.

    조홍제는 1930년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자 비료 사업의 필요성을 알고 ‘흥남질소비료공장’과 ‘만주화학’등 비료 관련 회사를 찾아다녀 대리점이나 지사개설을 추진하였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결론을 가지고 과거의 사실을 검증하기도, 추측하기도 한다. 조홍제의 성향으로 볼 때 1930년대 당시 비료대리점을 개설하였다면 10년 후쯤인 1940년대는 고향 함안이나 인근 마산, 진주에 큰 비료공장을 직접 세웠을 것이다. 한국경제의 앞날을 예측하고 1930년대 비료의 필요성을 판단한 조홍제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조홍제와 구인회의 축구사랑

    조홍제와 구인회는 유달리 축구를 좋아하였다. 오늘날 조기축구회나 축구동호회 모임을 운영한 것이다. 인접 함안이나 진주까지 원정을 가서 동네 대항 축구를 많이 하였는데 특히 조홍제의 군북팀은 구인회의 지수팀과 자주 만나 시합을 하였다. 군북에서 할 때는 함안 정곡 백사장변 초원이 축구장이었고 옛 지수장터 빈터가 지수의 축구장이었다.

    동네 대항 축구를 할 때면 동네 주민들도 응원단을 꾸리고 고구마, 감자, 과일 등 먹을 것과 꽹과리, 북 등을 준비하여 응원을 하였다. 동네 대항 축구시합 하나가 마치 동네 축제처럼 흥겨운 시절이었다. 취재 중 만난 90세 어른은 조홍제와 함께 하였던 아버지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말해 주었다.

    동네 대항 축구시합을 하면 “보통의 키에 다부진 체격의 조홍제는 공격수로 상대 골문 앞까지 뛰어가고 또 상대가 역습을 하면 골문 앞까지 수비를 하러 내려오는, 쉴틈 없이 뛰어다니는 역할을 했고, 구인회는 상대팀 골대 앞으로 정확하게 패스를 해주어 친구들이 골을 넣도록 기회를 만드는 역할이었다”고 회고했다.

    축구 시합이 끝나면 집에서 가져온 쌀이나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하여 뒷풀이를 한다. 고기도 굽고, 술도 한잔 한다. 선수들은 물론 구경하러 온 동네주민들도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땔감으로 준비한 장작을 손으로 쪼개는 객기도 부릴 나이였고, 먹는 양도 어마어마하였다. 진주 지수팀은 구인회가, 함안 군북팀은 조홍제가 비용을 대부분 부담하였다. 훗날 두 사람은 그룹 회장이 되어 골프친구로 함께 지냈다. 구인회와 조홍제의 깊은 인연은 이렇게 유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