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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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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⑪ 조홍제의 제일제당 창업이야기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무역업서 제조업으로… 이병철과 부산에 ‘제일제당’ 세웠다

  • 기사입력 : 2022-01-14 0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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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역은 큰 수익을 남겨주는 사업이지만 한편으로 수백 가지의 수출입 품목에 대해 국내시장 현황, 가격 시세, 주요 산지, 운송 선박편, 해외국가 여건 등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다. 무역은 이익이 많은 만큼 위험도 비례한다.

    조홍제가 예측한 대로 삼성물산에 배정된 고철 5만t을 다 수출하는 시점인 1953년에 이르자 고철 수출도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다. 삼성물산에는 행운이었다.

    조홍제 창업주의 말이다. “아무리 행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 행운을 붙잡으려고 하는 의욕이 없으면 잡지 못한다. 그리고 그 행운을 나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지혜와 남다른 노력이 없다면 역시 잡지 못한다. 그러면 일반인이 말하는 행운은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1953년 11월부터 생산을 시작한 부산진구 부전동(전포동) 옛 제일제당 공장./제일제당/
    1953년 11월부터 생산을 시작한 부산진구 부전동(전포동) 옛 제일제당 공장./제일제당/
    이곳은 현재 더샵센트럴스타 APT가 들어서 있다.
    이곳은 현재 더샵센트럴스타 APT가 들어서 있다.

    # 설탕, 페니실린, 아연도철판을 분석

    조홍제와 이병철은 무역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직접 생산을 하는 제조업에 진출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가 1953년 봄이다.

    수입 대체효과가 높은 제조업 품목을 사전 조사하였는데 그중 설탕, 페니실린, 아연도철판 등의 품목이 유력한 후보였다.

    설탕은 전량 해외에 의존한 상태였고, 페니실린은 항생제로 일반인과 의료인에게 필수 의약품이었다. 아연도철판 등은 6·25전쟁 이후 도시와 농촌의 피해 복구에 필수적으로 사용될 것이고, 건축자재로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제조업에 진출하기 위해서 한국보다 경제성장이 빠른 일본 시장을 먼저 조사한 후 추진하기로 하였다.

    # 설탕 사업에 집중키로

    삼성물산이 수입품목 중 중점으로 많이 취급한 것이 설탕이었다.

    제당 관련 시장 흐름을 삼성물산이 잘 알고 있었고, 특히 설탕은 국민 모두에게 필요한 생필품이라 그 필요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홍제 역시 설탕을 수입품목으로 취급하여 유통한 경험이 있어 이병철의 제당 사업 제안에 동의하였다.

    설탕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설비를 일본산 기계를 도입할 경우 공장건설을 추진하는데 삼성물산 자금을 총동원하여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국민생활 품목이나 제조업 공장 설립에는 은행 대출도 가능하였고 일부는 진주 거부 모씨에게 차입하였다. 1953년 6월, 마침내 부산 전포동에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제일제당 공장건설을 시작하였다.

    1953년 고철 수출 내리막길 치닫자
    이병철과 직접 생산 ‘제조업’ 진출 논의
    수입 대체효과 높은 품목 사전 조사 후
    시장흐름 잘 아는 국민 생필품 설탕 선택

    대출부터 차입·시중달러 등 자금 총동원
    부산 전포동에 제일제당 공장 건설
    기술자 뽑아 일본으로 보내 기술 익혀
    1953년 11월 5일 대한민국 첫 설탕 생산

    창업 초기 제일제당 등록 상표, CS는 Cheil Sugar의 머리글이다.
    창업 초기 제일제당 등록 상표, CS는 Cheil Sugar의 머리글이다.
    제일제당 로고가 선명한 고급설탕통, 당시 파격적인 컬러디자인으로 주부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제일제당 로고가 선명한 고급설탕통, 당시 파격적인 컬러디자인으로 주부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 진주 거부의 자본투자

    그렇다면 조홍제가 말하는 제일제당 설립에 거금을 투자한 진주 거부는 누구일까? 조홍제와 이병철 회고록에는 실명이 없다. 필자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병철의 매형인 진주 지수면 출신 ‘허순구’를 중심으로 실마리를 풀었다.

    허순구는 지수면의 거부 ‘허만정’과 친척 관계이다. 허순구가 처남 이병철의 사업에 진주 거부 허만정을 소개했을 것이라는 여러 요인 중 결정적인 확신은 제일제당 설립 시 경영에 참여한 주요 임원 명단에 허만정의 장남 ‘허정구’가 상무로 기록돼 있다.

    # 제일제당 설립

    6·25전쟁 후 달러가 귀한 시절 제일제당은 시중달러(암달러 거래)를 구입하여 기계 대금을 지불하고 설비와 발주를 끝낼 수 있었다.

    공장시설에 도입된 기계는 생산공장 기술책임자가 와서 설명해주는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이승만 정부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일본인의 입국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제일제당은 기술자를 뽑아 일본에 보내 기술을 익혀 오는 역발상을 추진하였다. 힘겹게 한 가지 한 가지씩 문제를 해결하고 마침내 1953년 11월 5일 한국인이 만든 설탕이 처음으로 생산되었다.

    1960년대 제일제당 공장 주변의 부산 서면 풍경, 소달구지와 전철의 모습이 보인다./제일제당/
    1960년대 제일제당 공장 주변의 부산 서면 풍경, 소달구지와 전철의 모습이 보인다./제일제당/

    # 달러 이야기

    전쟁 후 달러가 귀한 시절 당시 민간회사가 외국에 물건을 수입하면 달러를 지불하여야 하는데 정부에서 달러 보유액이 없어 달러 사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민간인이 사용할 수 있는 달러는 ‘중석달러, 종교달러, 시중달러’라는 게 있었다.

    중석달러는 정부기업인 대한중석에서 자금으로 삼아 직접 수입에 참여하거나 극히 제한된 무역업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부 관리하의 외화이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계통과 가까운 무역회사에 미국 등에서 보내주는 달러이고, 시중달러는 암달러 상인과 거래하는 것이다. 당시에 힘 있는 무역회사는 중석달러를 사용하였고, 기독교계 무역회사는 종교달러를 사용하였지만 일반무역회사는 무역행위가 참 힘든 시기였다.

    # 대한중석 중석불(달러) 사건

    중석불사건(重石弗事件)이란 1952년 6월 이승만 정부가 텅스텐(중석)을 외국에 수출하여 달러(중석불)를 확보하였다. 이 달러를 민간 무역업체에 싼 값에 매각하였다. 민간기업은 이 달러로 비료와 밀가루를 수입하였다.

    수입된 비료와 밀가루를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다시 판매하여 최대 10배에 달하는 이윤을 취하며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제공한 경제범죄 사건이다. 이 수익금을 정부가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발생한 사건이 중석불사건의 주요 배경이다.


    # 대한중석주식회사

    1952년에 설립한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는 설립 당시 종업원이 약 4300명이 되는 대규모 회사였다. 1968년 2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을 설립하는데, 정부가 75%, 대한중석이 25%를 투자할 정도로 회사의 규모는 대단하였다.

    1992년 4월에는 ‘대한중석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94년 2월 문민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침으로 매각하자 ‘거평그룹’이 인수하였다. 거평그룹이 대한중석을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하여 재계에 큰 뉴스가 되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거평그룹은 대한중석을 외국의 아이엠씨(IMC)그룹에 매각하였고, 대구텍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구텍은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이 최대 주주로 있다.

    # 거평그룹과 나승렬회장

    공기업 대한중석을 인수한 회사는 회계 분야에 전설을 가진 M&A의 천재 ‘나승렬 거평그룹 회장’이다. 대한중석 인수로 거평그룹은 국내 30대 대기업그룹에 진입하였다. 나승렬 회장은 이병철의 형 이병각이 이전에 경영하였던 삼강아이스크림 회사 경리부장 출신이다.

    세상은 크고 작은 인연, 깊고 얕은 인연 등 다양한 사연으로 씨줄 날줄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많다. 필자는 30대 초반 나승렬회장 비서실 과장으로 가장 가까이서 근무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성냥개비 회계 이야기처럼 나승렬 거평그룹 창업주의 회장 집무실에는 대형주판이 놓여져 있었는데 지면상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조홍제의 한마디> 나에게 온 행운을 잡으려면 남과 다른 준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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