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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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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① 구인회의 흔적을 찾아- 진주와 지수면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영남 제일 명당’ 진주, 남강 따라 ‘부자의 氣’ 흐르고…
북쪽에 비봉산·남쪽으로 남강 품은 진주

  • 기사입력 : 2022-02-11 07: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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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쪽에 비봉산·남쪽으로 남강 품은 진주
    고려시대부터 아름다운 경치로 인정받아
    봉황의 氣로 대대손손 인재도 많이 배출
    이중환 ‘택리지’서도 으뜸 명당으로 꼽아
    지수면은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고향
    일찍이 허씨·구씨 문중 터 잡고 부 일궈


    구인회의 한마디

    유교 경전을 자주 읽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 능력을 키워라

    진주는 산과 강, 그리고 근접한 곳에 바다까지 품고 있다. 뿐만아니라 학문적으로 선비사상의 기운도 많은 곳이라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겸손하고 부지런하여 일상에 여유와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과 같은 역사의 큰 상흔도 문화와 예술로 치유하여 ‘예향의 도시’, ‘대한민국의 상그릴라’ 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는 도시이다. 이와 연관지어 오늘날 진주를 상징하는 것 세 가지를 선택한다면 남강과 진주성, 촉석루를 꼽을 수 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개천예술제, 남강유등제, 비봉산도 진주를 대표하는 수식어로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진주 촉석루와 남강./진주시/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진주 촉석루와 남강./진주시/

    # 영남 제일의 경치 비봉산과 남강

    일찍이 고려시대 문신 이인로는 “진주는 시내와 주변 산의 경치가 영남에서 제일”이라 하였다. 진주시와 옛 진양군을 소개하는 ‘진양지’에 실린 비봉산 내용이다. “월아산 동쪽에는 비봉(봉이 날아가는 모습)의 형태를 가진 산이 있어 예로부터 정승이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진주의 비봉산은 도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데, 마치 봉황의 날개를 펼친 모양처럼 아름답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남해 금산에 갔다가 진주를 거쳐 한양으로 갔다. 훗날 조정 신하 중 영남지방에서 강(姜)·하(河)·정(鄭) 세 성(姓)을 가진 인물이 많이 나오자 무학대사로 하여금 진주의 지세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무학대사가 남강변 진주성터 봉오리에 올라서니 북으로 산이요, 남으로 강이라, 그 중앙에 있는 진주의 마을이 천하의 명당 자리였다. 그 북쪽의 산이 비봉산(대봉산)이고 남쪽의 강이 남강이다. 과연 경치가 “영남 제일이다” 하였다.

    # 봉황의 기(氣)가 있는 비봉산

    봉황은 왕의 상징이다. 대봉산의 의미가 큰 봉황이 있는 산이라, 무학대사는 한양 외 봉황의 터는 존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봉산의 등허리쯤에 지맥을 끊고 산의 이름도 봉황이 날아가 버린 비봉산(飛鳳)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날아간 버린 봉황을 잡기 위해 그물을 씌워 놓았는데 그 산이 망진산(網鎭)이다. 망진산은 후일을 기다리며 서울을 바라보는 망경(望京)산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진주를 조망할 수 있는 망진(望晉)산이라 부른다.

    봉황의 기운은 나라에 혼란이나 불운이 없어 모든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시대를 말한다. 진주 비봉산과 망진산에도 꼭 한 번 올라 봉황의 기운을 받아 무병장수와 재물복, 학복을 통한 가정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영남 인재의 절반은 진주에서

    고려말 포은 정몽주가 진주에 들러 비봉산 앞 비봉루에서 하룻밤을 묵고 시 한 편을 남겼다. “비봉산 앞에 있는 비봉루에서 하룻밤 잠든 사이 꿈을 꾸었다. 땅의 기운이 좋고 강·하·정씨의 인물이 뛰어나니 그 명성 장강처럼 대대손손 흘러가리라.”

    훗날 사람들은 인물이 뛰어난 강·하·정씨(지령인걸강하정)를 진주를 대표하는 성씨로 인식하였다. 포은 정몽주가 머물고 간 역사적 사실을 남겨놓기 위하여 1940년 초에 비봉산 아래 비봉루가 세워졌고, 그 밑으로 지수 출신 허만정이 사재를 기부하여 주도적으로 세운 진주여자고등학교가 멋진 풍광을 뽐내고 있다. 지금의 비봉루는 정씨 후손이자 입체감 있는 글씨체로 대한민국 서예계의 거장으로 서예사에 한 획을 남긴 은초 정명수가 거주하였던 곳이다. 한때는 타지역의 예술인들이 진주에 오면 반드시 들렀다가 가는 상징적 장소였다.

    # 이중환의 택리지 속 진주

    이중환의 택리지 속에 좋은 땅이란 첫째, 지리이다. 지리는 땅, 산, 강, 바다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살기 좋은 곳이어야 하는데, 풍수학적 지리는 물가에 부자가 많다고 하였다.

    둘째, 그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생리라 한다. 기름진 땅, 배와 수레로 물자 수송이 편리한 곳을 말한다.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 남원과 구례를, 경상도에는 진주와 성주가 첫째라 하였다. 셋째, 인심으로 동네 풍속이 좋아야 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산수가 좋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시대 명당 자리, 좋은 땅의 기운을 받는 곳을 소개하였는데, 경상도에는 진주의 땅이고 생리의 으뜸도 진주라 하였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최항은 “우리나라는 산수가 아름답기로 천하에 으뜸이다. 경상도 진주의 산은 영남에 서려 있어 웅장하고 빼어나다. 그 모습이 기이하여 아름다운 것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지리산, 덕유산 물이 모인 진양호 상류에는 청동기 시대 청동기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호수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따라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강가에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진주 남강의 물은 비옥한 토지를 주어 마을과 문화를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진주의 중심부 남강변 촉석루에서 30리 정도 강물을 따라 흐르면 물결이 회룡지형을 만들고 한반도를 돌려 놓은 듯한 형태의 동쪽에 지수면 승산리가 자리 잡고 있다. 지수(智水)와 승산(勝山)의 한자 표현은 지혜로운 물과 품격이 있는 산으로 해석함이 풍수지리에 가까운 명당 표현일 것 같다. 이러한 명당 승산리는 허씨 문중이 일찍 자리를 잡아 가세를 넓히고 부를 일구어 온 곳이다. 그 후 1700년경 구씨 성이 승산리 만석꾼 허씨 집안과 혼인을 하면서 승산리에도 구씨 가문이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 지수면 상동마을 출생 구인회

    지수면 승산리에는 상동마을과 하동마을이 있다.

    상동에는 구씨 문중이 살았고 주로 벼슬을 많이 하였다. 구인회 집안도 초기에는 천석꾼의 부자였다. 그러나 구인회 할아버지(구연호)가 30여년간 중앙의 관직에 있었지만 청렴결백하여 집안의 자산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구인회가 태어날 때 구씨 집안은 큰 부자는 아니었다.

    하동에는 허씨 문중이 많이 살았고 농토를 잘 일구어 부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한 마을에 두 가문이 살다 보니 자연스레 구씨, 허씨 가문의 혼인도 많아지게 되었고 친인척으로 맺어지면서 양가 관계는 돈독해졌다. 구인회 역시 1920년 14살 때 허씨 집안 대표 부자인 허만정의 재종 동생 허만식의 장녀 허을수와 결혼하였다.

    일제강점기 교육령은 1면 1학교 설립 방침에 따라 지수면에도 1921년 5월 7일 지수보통학교(현 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구인회는 2학년 과정에 입학하였다. 구인회가 천자문과 논어를 읊던 서당 아이에서 새신랑이 된 후 15살이 되면서 지수초등학교 신식학생이 되어 넓은 세상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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