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5일 (목)
전체메뉴

[촉석루] 스토리텔러, 숙자씨!- 임정향(영화PD)

  • 기사입력 : 2022-03-02 20:11:13
  •   

  • 창원 동읍 사시는 여든아홉 어머니가 3년 만에 서울을 다녀가셨다. 나의 새 집 이사를 축하한단 이유로 보고 싶었던 다섯째 딸집에 한 달여 계신 거였다. 직접 만든 음식으로 식사를 챙겨드리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일상이 새삼 귀하고 소중했다. 보청기가 없으면 대화도 힘들고 복용하는 약은 또 어찌나 많던지. 어머니를 지그시 보다가도, 대화하며 웃다가도,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복받치는 애틋함과 애잔함이 속울음 돼 참기를 얼마나 했던지…. 어머닌 그날그날의 사소한 반찬 하나에도, 뉴스를 보다가도 당신의 기억을 소환해 추억담을 들려 주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에, 6·25때 여름 수정에 와서 군함선을 타고 가족 모두 거제 지세포로 피난갔던 이야기를 하셨다. 군인들이 큰 창고 두 곳에 피난민들을 나뉘어 넣고 식구 당 가마니 두 장씩 던져주었다고 하며 그 해 가을이 돼서야 난포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집은 이미 불타 있었다면서 전쟁은 공포 그 자체라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하셨다. 또 어느 날은 신마산 중앙동 살 때 마산 중·고등 학생들이 교복 입은 채 3·15부정선거 규탄을 하며 도로를 새카맣게 뒤덮을 정도로 정의를 위한 데모를 했으며 한편에선 경남의 모든 경찰들이 다 모여 저지하는 상황을 생생히 보았다면서 당시 마산은 야성과 정의가 펄펄 살아있는 곳이었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으셨다. 갈치구이로 식사를 한 저녁엔 마산어시장을 자랑하셨다. 부림시장은 두 번이나 화재가 나서 보따리만 들고 이웃에 대피하셨다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바쁜 식당을 하면서도 마치면 땅콩집이 즐비했던 강남극장과 고려당 통단팥빵을 미리 사놓고 시민극장을 갔다는 얘기 등등 추억 주머니가 끝이 없었다. 어머니 말씀이 곧 우리의 현대사와 문화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영화기획,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작가들과 무수한 스토리를 만들었으나 이런 원석의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온전히 듣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고 품으신 여든아홉 숙자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머니의 오롯한 삶 자체가 아닐까? 이야기는 멀리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 이렇듯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리라.

    임정향(영화PD)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