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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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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할머님들의 회초리- 김주영(마산제일여고 교장)

  • 기사입력 : 2022-03-24 19: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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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봄에 자신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이라고 밝히신 한 분이 전화를 하셨다. 후배를 위해 올해 안으로 장학금 1억원을 기탁할 터이니 학교의 발전과 후배들의 장학에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단 전화를 끊고 그 선배님에 대해서 과거의 기록을 찾아 보았다. 본교의 3회 졸업생으로 올해 86세가 되는 노선배님이셨다.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해 수학하신 후 본교에서 짧은 기간 교사를 하시기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후 1000만원을 보내 주셨을 때, 서울에 거주하신다는 선배님과 짧은 전화 통화를 나눴다.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하실 생각을 하셨느냐고 여쭤 보았다. 선배님은 자신이 고교를 다니던 해방 직후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거들떠 보는 이 없는 여자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의 터전을 닦으시는 설립자님 부부의 희생적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으셨다고 한다. 어렵사리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이 어른이 되면 그 고마움에 꼭 보답하리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셨단다. 연세가 80이 넘고 보니, 그때 다짐했던 그 생각이 자꾸만 나고,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 마음의 약속을 지켜야 하겠다는 조바심이 생겨서 이번에 이를 실천에 옮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4월에 2000만원을 더 기탁하셨고 11월에 다시 7000만원을 말씀도 없이 입금하셨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전화를 걸어 서울로 찾아가서 뵙겠다고 하자,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시며 주소도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그러시면서 이어 던진 말씀은 내게 아픈 회초리처럼 다가왔다. 내 생을 이렇듯 빛나게 해 준 모교에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좀 주는 게 그게 무슨 대수냐고 하셨다. 이제 그 돈의 임자는 학교이니 아이들과 학교를 위해서 소신껏 써 주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그래도 사진이라도 한 번 찍자고 떼를 써 보았지만 끝내 거부하셨다. 집을 팔고 거쳐를 옮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찾아와도 못 만나니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나 신경 쓰라고 못을 박으셨다.

    집은 왜 옮기셨습니까? “이제 늙어서 큰 집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작은 곳으로 옮기면서 약속한 그 돈 맞추었지” 혹시라도 마음으로 약속한 1억원을 못 맞추지나 않을까? 늘 마음에 부담을 느끼다가 집을 옮기기로 결심했다는 말씀이셨다. 그 연세에 집을 옮기면서까지 자신이 살아온 고마운 삶에 대해 감사하고자 하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따끔한 회초리가 돼 내 가슴을 울리고 지나갔다. 노선배님 회초리의 얼얼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차 회초리가 떨어졌다. 1000만원이 또 입금된 것이었다. 언니의 장학금 기탁 소식을 들은 동생분께서 자신도 마음을 보태겠다고 보낸 장학금이었다. 이분도 83세이고 본교 6회 졸업생이셨다. 어려운 사람이나 공동체를 위하는 배려와 헌신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또한 살 만한 세상이라는 희망도 준다.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내가 받은 만큼의 사랑을 돌려줘야겠다” 감동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 주신 80대 노 졸업생 할머님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런 모습으로 비춰질 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이제 나부터 그런 삶을 실천해 갈 것을 다짐해 본다.

    김주영(마산제일여고 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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