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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8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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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⑦ 장사는 목이 좋아야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첫 장사 시련 이겨내고 진주 상권 거상으로 성장

  • 기사입력 : 2022-03-25 08: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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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년 7월, 진주 식산은행 맞은편 2층에 ‘구인회상점’이라는 간판이 올라갔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당시 진주 중앙시장의 포목점은 종선, 종환, 종만의 천씨 3형제가 ‘천종상회’를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이 중 막내인 ‘천종만’은 처가가 지수면 승산이라 가끔 구인회 형제와 인사도 나누었던 구면의 관계였다.

    어느 날, 천종만이 구인회 가게를 찾아와 “구 사장, 이곳은 터가 센 곳이라 장사가 잘되지 않는 곳이오. 장사는 목이 좋아야 하오” 하면서 가게 위치를 옮겨 장사를 해보라고 조언하였다. 구인회는 장사는 ‘주인이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천종만의 충고에 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전을 하지 않고 처음 개업한 가게에서 계속 장사를 하였다.

    ‘구인회주련포목상점’ 간판이 걸려 있다. 1936년 병자년 진주 대홍수 당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진주100년사/
    ‘구인회주단포목상점’ 간판이 걸려 있다. 1936년 병자년 진주 대홍수 당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진주100년사/

    # 첫 장사의 시련 - 식산은행 앞 가게

    여름에 가게 문을 열어 해가 바뀌고 봄이 다가왔다. 하루 찾아오는 고객의 수와 판매되는 포목의 양을 헤아려 보면 그렇게 장사가 잘 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구인회와 아우 구철회가 시름에 빠졌다. 여러 가지 대책을 고민하던 중 지난번 가게를 찾아 와 “장사 터가 좋지 않았다”고 말을 한 천종만이 문득 생각이 났다. 구인회는 천종만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 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천종만은 “장사는 목이 좋은 곳에서 해야 하고, 또 같은 업종이 여러 개 밀집되면 서로 장사가 잘돼요. 마침 우리 가게 앞이 비었으니 여기로 옮겨서 장사를 해보시오”하고 추천하였다.

    구인회상점 터는 1960~70년대 벨아미 의상실과 백조 세탁소로 바뀌었다./구인회회고록/
    구인회상점 터는 1960~70년대 벨아미 의상실과 백조 세탁소로 바뀌었다./구인회회고록/
    구인회상점 터에 의류가게가 들어서 있는 2022년 중앙시장 풍경. 정확한 위치는 반드시 공인기관의 확인 검증이 필요하다./이래호/
    구인회상점 터에 의류가게가 들어서 있는 2022년 중앙시장 풍경. 정확한 위치는 반드시 공인기관의 확인 검증이 필요하다./이래호/

    # 식산은행 앞에서 중앙시장으로 이전

    구인회는 식산은행 앞 가게에서 1932년 12월 천종만이 추천하는 새로운 터로 가게를 옮겼다. 가게 이전 후 1933년 3월, 결산해 보니 초기 자본금 3800원 중 500원(당시 쌀 100가마 정도)정도 결손이 난 상태였다. 새로 이전한 가게는 크고 위치도 좋아 임대료도 높았다. 새 가게에 더 많은 포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하였다.

    구인회는 다시 고향을 찾아 아버지에게 장사 밑천을 더 부탁하였다. 구인회 아버지는 땅 문서를 내어주시면서 다시 한 번 아들에게 충고를 한다. “네가 망하면 우리 집안도 망한다. 처음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주저앉지 말라. 무엇이든 꾸준하게 10년은 해보아야 결판이 난다. 절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하거라.”

    구인회 가게가 ‘구인회 주단포목’ 간판을 걸고 새롭게 매장을 차린 곳은 지금의 중앙시장 서북쪽 입구 종로거리이다. 1층 매장, 2층 전시장 및 창고 형태이다. 지금의 서경방송국 빌딩 주변은 1968년 현재의 장대동 합동주차장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시외버스 주차장이었다. 진주는 서부경남에 위치한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다. 구인회 가게 주변은 시외주차장과 진주에서 가장 큰 난전이 있는 진주장터가 있어 늘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목이 좋은 위치였다.

    1931년 식산은행 맞은편서 첫 상점 운영
    ‘터 안 좋다’ 충고에도 장사하다 시름 빠져

    1933년 중앙시장으로 이전해 새롭게 시작
    장사 잘됐지만 1936년 대홍수로 큰 시련

    투자금으로 많은 물건 비축해 재기 성공
    포목점 커지자 ‘진주상무사’ 선출의원도

    # 병자년 진주 대홍수

    가게에 물품도 많이 진열하고 작은 이윤을 내더라도 많은 손님에게 판매하는 박리다매 영업으로 새롭게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인회 포목상점은 친절하고, 물건의 질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꾸준하게 잘 되었다. 1935년 무렵, 장사가 잘 되어 경제적 여력이 생기자 진주 수정동에 일본인 관사를 구입하여 새 거처도 마련하였다.(2편 참고)

    잘 나가던 구인회 포목상점은 뜻하지 않은 시련을 맞게 된다.

    1936년 8월 26일부터 3일 동안 장대보다 더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이것이 ‘병자년 진주 대홍수’ 사건이다. 덕천강, 경호강에서 내려온 물이 남강둑을 무너뜨리고 진주시가지 전체를 덮쳤다. 진주 시내에서 가장 높다는 비봉산이 머리 꼭지만 보일 정도였다.

    시가지 중심에서 장사를 하던 구인회 가게 역시 쏟아져 내려오는 황톳물에 물건을 옮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홍수가 지난 후 구인회는 황톳물과 뻘에 범벅이 된 상품들을 남강변 백사장으로 가져가 씻고 말리면서 어떻게 재기를 할까 고민하였다.

    1937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구인회가 진주의 청년 실업가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
    1937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구인회가 진주의 청년 실업가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

    # 원창약방 사장과의 만남

    홍수로 적지 않은 재물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구인회는 홍수로 인해 사람들도 새로운 옷을 구입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오히려 포목을 더 많이 구입하여 장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홍수가 끝난 후 초가을, 구인회는 진주에서 유명한 한약방을 운영하는 원준옥 원창약방 사장을 만나 앞으로의 장사 계획을 이야기하고 돈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평소 구인회의 됨됨이를 알았던 원사장은 조건없이 큰 돈을 빌려주었다.

    자금이 확보되자 결혼에 필수품인 명주와 비단, 광목과 융 등 여러 재료들을 구입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좋다는 제품은 다 구입하여 창고에 비축을 하였다. 비록 여름에 대홍수를 겪었지만 가을에는 날씨도 좋고 농작물도 잘 되어 대풍을 이루었다. 구인회의 예상대로 혼수품이나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구입해 갔다. 주인과 종업원의 친절과 질 좋은 옷감, 저렴한 가격 등으로 ‘행운의 가게’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포목점의 판매도 늘고 규모가 커지자 진주 상공업계에서도 구인회의 존재가 날로 커져 갔다. 1936년 11월에는 지금의 상공회의소 격인 ‘진주 상무사’ 선출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진주 상권의 거상으로 성장해갔다.

    # 사천 다솔사와 허백련 화백

    25세(1907년생)의 청년 구인회는 진주에서 포목점을 개업한 후 사천 곤양에 있는 봉명산 다솔사를 찾아 주지인 ‘석란 최범술’을 틈틈이 만나 교류하였다. 최범술은 절 주변에 죽로차를 재배하여 근대 다도문화를 재건하면서 명상의 기(氣)가 잘 통하는 사찰로 만들었다. 다솔사 명상길도 추천하고 싶다. 이병철편에 나오는 문산정 걷는 길과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길이다.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이 머문 곳이며, 백산 안희재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장소로 접촉한 곳이다. 소설가 김동리가 ‘등신불’을 쓴 곳이다.

    우리 명산을 화폭에 담아 ‘무등산이 된 화가’로 불리는 한국 전통회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화백’ 등 예술인과도 교류하였다. 1932년 7월 국내에서 문을 연 최초의 백화점인 서울 삼월오복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허백련 화백이 회화전을 개최하였다. 허백련은 구인회가 다녔던 중앙고보 교장 김성수와 일본 유학시절 한 집에서 함께 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서울 전시회가 끝나자 구인회의 지원으로 진주에서 개인전도 개최하였다.

    <구인회의 한마디>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면 서로가 돌아서니, 반드시 작은 분은 참고 견뎌내야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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