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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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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마산방어전투 유일한 학도병 생존자 류승석씨

마산 토박이 10대 소년, 총도 군번도 없이 전장으로…

  • 기사입력 : 2022-04-06 21: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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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묵념(默念). 국민의례의 일부분으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안식을 위해 마음속으로 비는 것. 순국선열은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투사를, 호국영령은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참전용사를 칭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을 마치고 찾아오는 1분 남짓한 침묵의 시간. 누군가에는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순간이겠지만,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류승석(91)씨에게는 70여년 전 눈앞에서 희생되던 동료들을 다시금 생각하고 기리는 순간이다.

    류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2월 열린 ‘마산방어전투 참전용사 추모 및 전승기념식’ 행사에서다. 마산방어전투 참전자 중 유일한 마산지역 생존자로 소개된 그는 행사 내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참전용사를 추모했다. 그에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지난 28일 창원시 양덕동 삼각지공원 내 참전기념탑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류승석 한국전쟁 마산방어전투 학도병 생존자가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 참전기념탑 앞에서 학도 호국병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류승석 한국전쟁 마산방어전투 학도병 생존자가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 참전기념탑 앞에서 학도 호국병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18살 나이에 군번·군복·총 없이 전장으로= 5대째 마산에 살고 있는 류승석 씨는 합포중학교 4학년(만 18세)에 재학 중이던 1950년 7월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학도병 자원을 꺼려했지만, 학교 학도호국단 감찰부장을 맡고 있었던 류씨는 앞장서서 자원했다.

    함께 입대한 학교 선후배는 10여명. 이들은 부산 제5연대에서 신고식을 마치고 마산 월영동에서 100여명의 학도병과 함께 일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이어 진주를 거쳐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전북 남원으로 향했다. 전장으로 향한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박격포탄 5개가 전부였다.

    류씨는 “군복도 총도 개수가 부족하다 보니 빠릿빠릿한 사람 몇 명만 가질 수 있었다. 박격탄포를 받긴 했지만 박격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참전하게 됐고 후퇴 명령에 순천으로 내려가게 됐다”고 전했다.

    순천에서 일본군이 사용하던 소총을 받았지만 실탄은 없었다. 한 야산에서 보초를 서던 중 인민군이 급습했고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류씨는 홀로 인근 민가로 숨었는데 민가 주인의 도움을 받아 다음 날 아침 옷을 갈아입고 고향 마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마산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수차례 인민군과 마주쳤고 학생 행세를 하며 의심 풀기를 반복했다. 섬진강 다리 앞에서는 인민군의 부탁에 복구 공사 노역에 동원됐다가 탈출하는 상황도 있었다.

    합포중 4학년 재학 중 6·25전쟁 참전
    미군 소속 ‘이름 없는 군인’으로 복무
    진동서 북한군 위장해 정보수집 임무
    동료 15명 죽고 떠나 홀로 군생활 지속

    대한민국에 학도병 복무 기록 없어
    70여년 된 미군 수건 유일한 증거품
    전쟁 말미 공군 부사관으로 정식 입대
    총 14년 복무 후 전역했지만 앞길 막막

    고향서 재향군인 복지 증진·봉사 앞장
    죽기 전 마산방어전투기념관 설립 꿈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강력 규탄
    “참혹함만 남는 전쟁 반드시 막아야”

    ◇빵모자 쓰고 미숫가루 통 매고 적진으로= 류씨가 어렵게 마산에 도착한 시기는 8월 초. 그는 오동동에 있는 학도의용군 본부에 들렀고 전국에서 피난 온 학도병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곧이어 특무대(국군안보지원사령부) 간부가 학도병들 중 전투 경험이 있는 30여명을 차출해 부대를 편성했다. 주된 임무는 정보수집. 하지만 류씨가 들은 세부 내용은 너무나 무모해보이기만 했다.

    “인민군으로 위장해 마산 진동·함안지역에 주둔한 적군 부대에 침투, 정보를 수집하라.”

    일주일간 특수훈련을 받았지만 적과 접촉하라는 명령에는 그저 막막함만 몰려왔다. 임무 수행 전날 류씨와 부대원들은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전의를 다졌다. 부대원 30명 중 류씨를 포함한 15명은 진동, 나머지 15명은 함안으로 향했다. 한복을 입고 빵모자를 쓰고 한쪽 어깨에는 미숫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둘러 인민 의용군인처럼 꾸몄다. 실탄이 든 총을 지급받았지만 그저 무겁게만 느껴졌다.

    임무 기간은 단 일주일.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의욕은 컸지만 인민군과 접근하는 것조차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위장 자체도 어설펐고, 적군을 속일 능숙함도 없었던 그들은 날이 지날수록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군 없는 전장 속에서 5일을 버텼다.

    당초 류씨 부대는 일주일 뒤 복귀 일시에 맞춰 진동 고현방향 다리 앞에서 웃통을 벗고 손을 들고 나타나기로 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 부대원들은 5일 만에 복귀를 결정했다. 전날 인근 논에서 잠을 청한 이들은 아침 일찍 미군 탱크가 배치된 목적지로 향했다. 다행히 미군의 총성은 없었고 류씨의 마산방어전투에서의 임무는 마무리됐다.

    류승석씨가 70여년 전 미군 부대에서 받은 국방색 수건을 들어보이고 있다.
    류승석씨가 70여년 전 미군 부대에서 받은 국방색 수건을 들어보이고 있다.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보이’= 류씨는 살아 돌아왔지만 작전 수행 과정에서 그의 동료 15명 중 8명이 실종됐다. 나머지 7명도 복귀 후 하나 둘 부대를 떠났다. ‘미 25사단 소속 특수부대’에 소속돼 있었지만 군번 하나 없는 이름 없는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류씨 혼자 미 25사단에 남았고 금화, 의정부 토성, 동두천 등으로 북진할 때에도 함께 했다.

    미군은 류씨를 ‘보이’라고 불렀다. 아마 군부대 따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을 뜻하는 ‘하우스 보이’의 의미였을 것이다. 류씨는 2여년간 미군과 함께 했지만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신분에 대한 불확실성에 1952년 6월 부대를 나왔다.

    그는 인터뷰 도중 가방에서 국방색 수건을 꺼내 보였다. USA라 적혀 있는 수건은 70여년 전 류씨가 미군 부대에서 받은 물건이다. 그리고 그가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품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류씨의 학도병 활동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가 학도병을 나온 후 곧장 공군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류씨는 1952년 10월 공군 부사관으로 임관해 남은 6·25전쟁 기간을 포함해 12년을 복무했다. 33살의 나이에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것을 잃은 그에게 마땅한 일자리는 없었다. 어렵게 식당을 운영하며 군복무 경험을 토대로 6·25참전유공자회 경남마산지회장 등을 역임하며 재향군인 복지 증진 및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전쟁은 참혹, 반복 막기 위한 역사교육 필요”= 91세 노병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6·25전쟁 당시 참혹했던 모습을 생각하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했다. 류씨는 “전쟁은 양 국가간의 승패가 전부가 아니라 민간인들의 희생이 반드시 잇따르기 때문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면 안 된다”라며 “특히 6·25전쟁 당시 북한과 현재의 러시아처럼 일방적인 침략 행위는 더욱 지탄받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과거 수차례 안보교육을 진행했던 그는 도민들이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 마산방어전투가 있었던 창원 일대에 마산방어전투 기념관을 설립해 안보의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 성지로 알려진 마산에 3·15의거발원지기념관, 민주주의전당 등 건물이 설립돼 지역 민주화 역사 교육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죽기 전에 마산방어전투 기념관이 창원에 설립돼 그곳 강단에서 마산 전쟁사에 대한 강연을 하는 등 헌신하며 삶을 마감하고 싶다. 그렇게 해야 매번 짧은 묵념으로만 기리던 희생된 국군·미군 전우들을 보다 자랑스럽게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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