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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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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우리의 4월은- 김효경(시인)

  • 기사입력 : 2022-04-07 20: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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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칠 전 성주사 계곡으로 봄 마중을 다녀왔다. 사람들 발길에 닳은 둘레길과 황톳길 너머 숲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은 새움을 틔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다듬어놓은 일부 구간 말고, 생겨난 그대로인 채 있는 숲은 그야말로 무위(無爲)였으며, 그래서 더없이 상냥하고 아름다운 자연(自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연둣빛 풍경에 가슴을 설레면서도, 하루의 안녕이 불안한 세상을 사는 까닭인지 내년에도 이 자리에서 저 풍경을 볼 수 있을지 저어하며 잠시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맹목적 폭력을 저질러놓고도 겸손하지 않는 인간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인은 전쟁 중에 저지른 잔혹성을 참회할 줄 모르는 인간은 더 이상 창조주의 형상으로 빚어진 ‘고결한 존재’가 아니며, 그런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땅’은 결국 ‘신에게 버림받은 땅’이라는 경고를 던지면서 ‘죽은 땅에 라일락을 키워내’긴 하지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왜 하필 잔인하다고 했을까. 그때 만약 인간이 낮은 자세로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시인이 바라본 4월은 달라졌을까? 만약 그랬다면 하마터면 이 명 문장을 못 만날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찔하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일에는 자연스레 일어나는 시기가 있다.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옛말이나, 종교를 떠나 모두가 즐겨 쓰는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가 그걸 말해준다. 엘리엇이 4월을 바라볼 때 ‘잔인한 달’이라 느낀 것도, 때가 되면 우리가 그 문장을 떠올리며 전율하는 것도 그래서이고, 죽을 힘을 다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생각 외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 영원히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떠나가는 것, 하다못해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놓는 사건이 생기는 것도 다 그래서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 같던 반쪽, 그 사람과 일체가 돼 가슴 벅차게 품에 받아 안은 아이, 가끔은 부딪혀도 뒤끝이 없는 친구, 사촌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이웃, 빈집에서 반겨주는 반려동물 등을 만난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이다.

    지금 시절은 소생의 시절이다. 봄비가 내려 뿌리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또 새 잎사귀를 돋아나게 하고 있다. 이런 풍경은 누구라도 해마다 마주한다. 그럼에도 마치 여행길에서 만난 낯선 풍경에 그러하듯 해마다 탄성을 지른다. 이런 4월을 인디언 블랙푸드 족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라 이름 붙여줬다. 자연의 변화에 충실했던 그들의 마음엔 오로지 시절이 주는 기쁨만이 충만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4월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생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기엔 아픈 역사가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잔인한 달일 수도 있겠다. 다시 찾아온 봄, 저 꽃비가 사람들 가슴에 슬프지 않게 내리길 빌어본다.

    김효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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